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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까지 따져야 겨우 임대 성공”

도일 남건욱 2006. 1. 9. 13:03
“풍수지리까지 따져야 겨우 임대 성공”


上海 푸둥신구에 독자 건물 짓고 임대업하는 포스플라자 박래권 사장…90% 이례적 입주율 자랑

글 양선희 중앙일보 산업부 기자 (sunny@joongang.co.kr)





포스플라자 박래권 사장
“중국은 그렇게 쉽게 돈이 벌리는 곳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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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푸둥 마천루숲인 루자쭈이(六家嘴) 금융무역구의 유일한 한국 빌딩인 ‘포스플라자’ 박래권(朴來權) 사장은 이렇게 한마디로 쐐기를 박았다. ‘중국에서도 가장 화려한 도시로 각광받고 있는 푸둥에 부동산 투자를 하면 많은 돈을 벌고 있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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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플라자는 텅 비어 있는 푸둥의 다른 빌딩들과는 달리 90% 이상의 입주율을 자랑한다. 그래도 돈을 벌지 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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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朴사장은 뜬금없이 “이 사무실이 어때 보입니까” 하고 물었다. “…” “풍수를 보는 사람을 불러다 이 건물에서 가장 풍수지리가 좋은 곳을 골라보니 이 자리라고 해서 사무실을 옮겼습니다. 하도 사무실 임대가 안 돼서 온갖 짓을 다 하던 중에 풍수까지 동원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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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을 90%까지 채우는 게 얼마나 만만치 않은 일이었는지에 대한 얘기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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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플라자는 1999년 10월에 준공됐다. 그러나 첫 입주자가 들어오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1년간 전기세·수도세 물어가며 파리만 날린 것이다. ‘첫 입주자를 모시는’ 게 이렇게 늦어진 건 누가 잘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푸둥에는 빈 건물이 넘쳐나 입주자를 찾는 일이 하늘의 별따기였기 때문이다. 푸둥의 건물은 ‘공급이 수요를 초과했다’는 정도의 점잖은 말로는 설명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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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묵은 ‘인구론’의 한 구절처럼 ‘건물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면 입주하려는 기업이나 사람들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었다’고 말하는 게 적당할 정도다. 푸둥의 허허벌판엔 10년 만에 20층 이상 고층건물만 3백여동이나 들어섰을 정도로 건물이 마치 ‘세포분열하듯 번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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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가 90년 푸둥 개발을 공식 발표하면서 중국 내에 있는 각 성(省)·시(市)와 국영기업·정부기관에 건물을 지으라고 푸둥의 땅을 배정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포스플라자와 일본의 모리빌딩 등 두 개의 외국자본이 지은 빌딩도 덩달아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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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이 이렇다 보니 빌딩이 차지 않는 건 누구 탓을 할 일도 못 됐다. 朴사장은 이렇게 파리를 날리며 나름대로 작전을 세웠다. 그러면서 찾아다니며 사정을 해서는 건물의 품위가 떨어지고 다른 건물들과 차별화가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완성한 전략은 ‘기업차별 전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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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5백대 기업·IT장비업체·서양의 기업 또는 단체’라는 조건에 만족하지 않으면 받지 않겠다고 온 푸둥에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러는 한편에선 푸둥에 투자하기로 했다는 컴팩을 우선 입주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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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망·위성송수신장치 등 원하는 모든 인프라를 제공하기로 하고 임대료도 파격적이다 못해 ‘뼈아픈’가격을 제시했다. 유명한 회사를 입주시켜 건물이 유명해지는 게 우선과제였기 때문이다. 컴팩의 입주가 완료되면서 입주자 모집도 날개를 달았다. 이어 델파이사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고, 주중 독일상공회의소도 입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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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AT&T·미쉐린·루프트한자 등은 제발로 찾아왔다. 그리고 컴팩이 입주하면서 완벽한 통신시설이 갖춰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중국·외국 기업들이 찾아왔지만, 세 가지 기준에 들지 않는 기업들은 모두 거절했다. 건물의 반 이상이 비어 있으면서도 콧대 높게 장사를 하자 이상하게도 입주희망자들이 꼬였다. 덕분에 뒤에 들어온 입주사들에 대해선 ㎡당 임대료를 푸둥에서 가장 비싸다는 모리빌딩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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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젠 돈벌 일만 남은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朴사장은 이렇게 해도 남는 건 없다고 했다. 최고로 높게 받은 임대료가 이 건물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던 95년 당시 상하이 임대료의 10∼20%에도 못 미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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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개발이 푸둥 부동산을 잡은 것은 상하이의 부동산 거품이 절정에 달했던 때였다. 90년대 초반 중국이 천안문 사태로 닫혔던 문을 다시 열기로 하면서 외국 기업들이 일제히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에 상하이에는 푸둥지구도 없었고, 있는 거라곤 옛날에 지어진 푸시지구의 건물들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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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사무실 임대료는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다. 서둘러 건물이 지어졌지만 90년대 중반까지도 수요가 공급보다 넘치고 있었다. 이 상황을 보면서 당시엔 건물만 지으면 5년 안에 투자비를 뽑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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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포스플라자가 문을 열 당시엔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아시아 경제위기로 예전처럼 외국 기업들이 몰려오지도 않았고, 주변에 건물은 무수히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임대료도 푹 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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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사장은 “앞으로 임대료는 조금은 더 오를 것”이라면서도 “95년과 같은 호황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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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중국에서 건물을 짓는다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50년 임대로 받은 푸둥의 땅값은 ‘중국의 땅값’이 아니다. 푸둥에서 땅값을 계산하는 방식은 좀 특이하다. 가격 매기는 기준은 평당가격이 아니고 몇 층이 올라가느냐는 용적율당 가격으로 매긴다. 지상 연면적당 얼마라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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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플라자는, 땅은 3천4백평(11,425㎡)에 불과하지만 건물의 연면적이 98,129㎡여서 이에 해당하는 2천3백30만 달러를 지불했다. 평당가격으로 치면 1천만원 정도 된다. 건물 짓는데 1억5천만 달러를 투입했으니 투자분을 회수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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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사장은 “푸둥의 건물은 우리와 모리빌딩을 빼면 모두 중국 정부가 소유한 것”이라며 “돈이 벌린다면 왜 미국이나 유럽의 부동산개발 회사들이 들어오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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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국제화가 진행 중인 푸둥의 한복판에 건물을 지어놓고 앉아있다 보니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세계 기업들의 행태와 중국 정부의 매커니즘 같은 것을 알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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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사장은 “세계 1백대 기업이 왜 1백대 기업인지를 여기 와서야 알았다”며 유명한 미국의 다국적기업 A사와 얽힌 일화를 한토막 들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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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사는 상하이에 투자를 하면서 사무실 임대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 포스플라자에 임대료를 깎아달라는 협상을 푸둥신구 정부의 국장과 처장 3명을 朴사장에게 보내 벌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푸시지구의 건물도 협상을 벌여 푸시지구와 푸둥 간에 유치경쟁을 벌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웬만하면 만나기도 힘든 중국의 공무원들을 1백대 기업들은 부하직원 부리듯 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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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朴사장은 푸둥 공무원들의 경쟁력도 놀랍다고 했다. 朴사장은 “푸둥의 공무원은 만나기는 힘들지만 일단 만나면 보람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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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한 그의 일화 한 토막이다. 건물을 지어놓고 텅 비어 있을 때 전기료도 보통 부담이 아니었다. 이 곳의 전기료는 사용량만큼 내는 게 아니라 시설용량으로 계산해 매기기 때문에 건물이 비어 전기를 쓰지 않으면서도 이 건물에 깔린 전기선의 용량만큼을 몽땅 전기료로 물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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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담당국장에게 면담신청을 한 뒤 3달 정도 기다려 만나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이 국장은 그 자리에서 담당 처장과 실무자들을 불러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했고,실무자들은 여러 가지 기존의 처리방침 등을 들어 해결책을 찾아준 것이다. 그리고는 그 다음 달부터 전기료를 대폭 깎아주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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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사장은 “푸둥에선 30∼40대 젊은층이 공무원이 되면서 효율성을 중시하고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찾는 등 정말 달라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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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그는 “푸둥에선 문제가 일어나면 직접 시당국과 부딪쳐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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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사장은 “외국인이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중국인처럼 하지 말고 외국인처럼 정석대로 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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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중국에선 ‘돈과 인간관계면 모두 된다’는 식으로 그때그때 모면하려고 하다가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해결이 지연돼 결국에는 낭패를 보는 일이 많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제를 봐준 공무원은 그냥 잠시 덮어줄 뿐 완전히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에 후임자가 오면 또 똑같은 문제를 제기해 계속 쳇바퀴를 돌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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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사장은 한국에 가면 중국에서 사업하려는 사람들에게 꼭 이 얘기만은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 얘기는 “중국에선 꼭 원칙대로 사업하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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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호수 618 | 입력날짜 2002.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