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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사람이 앞사람 돈 대주기’ 버블 경제 쳇바퀴같은 역사

도일 남건욱 2006. 6. 3. 03:29
‘뒷사람이 앞사람 돈 대주기’ 버블 경제 쳇바퀴같은 역사
버블전쟁

87년 주가 폭락에 놀란 투자자들이 신문을 읽고 있다.

1925년 미국의 한 부동산 업자가 플로리다의 잭슨빌에 등장했다. 플로리다의 부동산이 한창 달아올랐던 시점이었다. 그는 한몫을 잡으려 했다. 사람을 끌어모았다. 상상하기 어려운 이익을 주겠다며 돈을 끌어들였다. 투자자들은 의심스러웠지만 돈을 냈다. 워낙 조건이 좋았던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이익을 줬다.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돈을 투자했다.

하지만 결국은 망했다. 먼저 투자한 사람에게 뒤에 투자한 사람의 투자액을 주는 이 방식은 지속적인 투자, 그것도 점점 더 큰 투자가 있어야 유지가 된다. 어느 시점에서 투자금이 줄어들면, 그래서 앞선 투자자에게 이익을 주지 못하면 망한다. 결국 그 부동산 업자는 26년 원금을 모두 날리고 사기꾼으로 몰렸다. 많은 투자자가 돈을 날린 것은 물론이다.

“강남은 폰지 게임검색하기장”

주인공은 바로 찰스 폰지. 그의 악명과 피라미드 판매식 사기 기법은 워낙 널리 알려져 경제학 전문 용어로까지 자리 잡았다. 이른바 ‘폰지 게임’이다. 뒷사람의 돈으로 앞사람의 수익을 맞춰주는 일종의 ‘머니 게임’이다. 많은 사람이 달려들어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값을 올려놓으면 뒷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돈을 넣어 앞서 투자한 사람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게임이다. 결국 뒤늦게 투자한 사람은 엄청난 손해를 본다.

최근 청와대가 일부 지역의 부동산 가격 폭등과 관련해 그의 이름을 거론했다. “현재 서울 강남의 집값도 폰지 게임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비싼 가격에 집을 사더라도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면 게임은 지속되는데 더 이상 높은 가격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으면 최후에 구입한 사람은 이른바 ‘상투’를 잡게 되고 게임은 아웃된다”고 말했다.

폰지 게임이 꼭 부동산시장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를 이유도 없는데 뒷사람이 계속 투자할 것을 기대해 투자한다면 투자자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폰지 게임을 하는 것이다. 부동산 외에 대표적 시장이 곧 주식시장이다. 일단 주가가 뜨기 시작하면 주식 관계자들이 바람을 잡고, 언론은 그들의 장단에 춤을 추고 투자자들은 한도 끝도 없이 돈이 들어올 것으로 생각해 돈을 넣는다…. 주식시장에서의 폰지 게임도 같은 것이다. 청와대는 “강남의 부동산 시장은 1990년대 벤처 거품을 닮았다”며 이 역시 폰지 게임이라고 주장했다.

폰지 게임은 엄청난 ‘버블검색하기’을 일으킨다. 실제 가치는 얼마 안 되는데 많은 사람이 이 게임에 참여함으로써 값을 턱없이 올려놓는다. 그러다 청와대의 표현처럼 “게임은 아웃”된다.


자본주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수도 없이 많다. 물론 찰스 폰지가 등장하기 전에도 있었다. 튤립 값이 오르자 너도 나도 튤립을 재배해 나라 전체를 광기로 몰아넣었던 1630년대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이나, 1716년 프랑스 왕립은행이 모든 지폐를 황금으로 바꿔준다며 마구 돈을 찍어내 터져나온 통화 버블 등은 자본주의사회 초기에 나온 대표적인 폰지 게임이었다.

이때 나온 버블은 지금과는 달랐다. 자본주의가 막 시작되던 시기에 초보적이면서도 엉성한 모습이었다. 피해자 규모도 작았고 지역도 국지적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버블은 얘기가 다르다. 버블의 규모가 상상할 수 없이 커졌다. 피해 규모가 커진 것은 당연했다.
25~26년 폰지가 일으킨 사기극은, 실은 거대한 버블의 한 부분에 불과했다. 20년대 초 시작된 플로리다의 부동산 투기 열풍은 폰지가 활동하기 시작한 25년부터 광풍으로 치닫고 있었다. 20년 이후 5~6년 동안 땅값은 수백 배가 뛰었다. 24년 15만 달러에 팔린 땅은 20년 전 겨우 800달러였다. 이 버블은 당연히 꺼졌다. 26년 대규모 허리케인이 플로리다를 덮치자 휴양지·관광지라는 이미지는 급속하게 무너졌다.

20년대 美 국민 25%가 ‘주주’

▶1920년대 미국의 사기꾼 찰스 폰지.

부동산 버블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는 80년대 일본이다. 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 가치가 급속하게 상승하자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벌어뒀던 돈을 땅에 묻기 시작했다. 땅값 하락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일본이어서 엔화 가치 상승으로 떨어진 제조 부문의 수익률을 땅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기업으로부터 시작된 땅값 올리기는 이후 일반인까지 가세하자 땅값이 치솟았다. 80년대 초반 일본의 부동산값 총액은 국내총생산(GDP)의 3배였지만 80년대 후반에는 5.5배까지 뛰었다.

부동산보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게임이 주식이다. 사실 부동산은 규모가 커서 돈 없는 서민은 끼어들 여지도 별로 없다. 중산층 이상의 부유층만 참가할 수 있는 게임이다.
반면 증시는 그렇지 않다. 적은 돈으로도 주식을 살 수 있다. 그야말로 전 국민이 뛰어들어 함께 버블을 만들어 간다.

29년 미국 전체를 휘감았던 주가 버블은 말 그대로 ‘전 국민의 잔치’였다. 역사가들은 당시 주식에 투자했던 미국인이 3000만 명에 이르렀던 것으로 추산한다. 당시 미국 인구가 1억2000만 명이었으니 4명 중 1명이 주식 투자를 했던 셈이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주식 투자를 했다고 봐야 한다. 24년 이후 성장일로에 있던 주식시장은 27년부터 본격적으로 달아올랐다. 플로리다 투기로 간 돈이 허리케인으로 빠져나온 상태에서 연방준비은행이 재할인율을 낮추자 시장이 폭발했던 것이다.

80년대 후반의 미국 증시 버블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때의 버블은 20년대 후반과는 성격이 달랐다. 몇몇 금융기관이 새로운 투자기법을 창안해 냈고 그 기법을 통해 기업을 인수하고 매각하는 과정에서 주가가 폭발적으로 뛰어올랐던 것이다. 87년 들어 주가지수는 8개월 사이 40%나 올랐다.

회사의 인수합병(M&A) 소식이 퍼지면 개미군단이 달려들어 주가를 올렸다. 경우에 따라서는 주식 보유자가 M&A 소문을 흘려 주가를 띄우고는 주식을 팔아치우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시 정크 본드를 통한 M&A를 창안했던 투자회사 드렉셀 번햄 렘버트의 한 임원은 “적대적 M&A는 장난감 거래와 같다. 이 시장은 어른들을 위한 디즈니랜드”라고 말했다.

90년대 말 생겼던 정보기술(IT) 부문의 버블은 가장 최근의 사례가 될 것이다. 90년대 초 짧은 불황기를 거치자 주가가 뛰기 시작했다. 꾸준한 성장을 하면서도 물가가 높지 않았던 미국은 이를 ‘신경제’라 부르며 인터넷과 지식경제에 그 공을 돌렸다. 인터넷 관련 주가는 점점 높아져 90년대 중반 이후 폭발했다.

▶1929년 버블 주가의 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항은 엄청난 실업자를 양산했다.

98년 9월 18달러로 공개된 인터넷 경매의 황제 e베이가 당일 47달러로 마감됐고 그해 말 종가는 241달러였다. 인터넷 기업에 대한 투자액은 90년 30억 달러에서 99년 600억 달러로 늘었다. 이 역시 언젠가는 꺼질 거품이 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버블은 반드시 꺼진다. 역사가 그것을 말해 준다. 버블의 크기가 클수록 꺼질 때의 충격 역시 크다. 언제 어떻게 꺼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버블이 붕괴하면서 실물이 다치기도 한다.

1926년 꺼진 플로리다의 부동산 버블은 순식간에 ‘세계 최고의 휴양지’를 폐허로 만들었다. 게다가 이 버블의 붕괴는 증시에서 새로운 버블을 만들었다. 29년 이 버블이 꺼지는 순간 세계는 대공황의 깊고 긴 수렁으로 빨려들어갔다. 80년대 후반의 부동산 버블 붕괴로 일본 역시 10년 이상의 장기 불황을 겪어야 했다.

모든 버블의 붕괴가 경제 전반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미국의 버블은 경제 전체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전문가들은 일단 버블의 크기를 중시한다.
이때의 버블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는 얘기다. 둘째, 버블 붕괴 과정에서의 대처다. 기민하고 신뢰를 주는 정책은 그나마 필요 이상으로 투자자를 시장에서 내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버블을 끌 때의 방법도 그만큼 중요하다.

이재광 전문기자 (imi@joongang.co.kr [840호] 2006.05.29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