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이야기

치우 [蚩尤]

도일 남건욱 2006. 7. 3. 18:11
원본 http://blog.naver.com/chunbje/60025187942

치우 []

 

중국과 한국 등에서 전쟁의 신으로 일컬어지는 전설적 인물.

 

중국의 여러 고서와 한국의 《환단고기()》등에 등장하는 전설적 인물이다. 흔히 군신()·병주() 등 전쟁의 신으로 통한다. 치우천왕·자오지천왕()·자오지천황·자오지환웅()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중국
먀오족[] 신화에서는 먀오족의 옛 이름인 구려()의 군주로 등장하고, 사마천()의 《사기()》〈봉선서()〉에는 한()의 고조 유방()이 패공()으로 칭한 뒤, 곧바로 치우에게 제사지내고 피로 북과 깃발을 붉게 칠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산해경()》에 따르면, 치우는 탁록의 싸움에서 황제()와 싸우다 응룡()에게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기록에서는 중국의 자료에 보이는 것과는 많은 점에서 다르다. 치우가 기록되어 있는 대표적 문헌은 1675년(숙종 1) 북애노인()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
규원사화()》(상권)와 계연수()가 1911년에 편집한 것으로 보이는 《환단고기》이다.

두 문헌에 따르면, 치우는 배달국()의 제14대 천왕(천황)인 자오지환웅이다.
기원전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6개의 팔과 4개의 눈, 소의 뿔과 발굽,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 81명의 형제가 있었고, 병기 제작 능력이 뛰어나 활·화살·창·갑옷·투구 등 각종 무기를 만들어 신농()을 무찔렀다. 또 12개의 제후국을 합병하였는데, 70여 회의 전쟁에서 1번도 패하지 않았고, 헌원()을 황제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문헌에서는 치우를 우리 민족 최고의 전쟁 신으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위의 두 문헌은 학계에서 신빙성이 없는 저술로 여겨 치우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일부에서는 고대 왕릉이나 기와 또는 민담 등에 등장하는 도깨비의 조상을 바로 치우 또는 치우의 변형으로 보기도 한다.

2002년
제17회 월드컵축구대회(한일월드컵) 때 한국 대표팀의 응원단인 붉은악마트레이드마크 도안도 치우(도깨비)의 이미지에서 딴 것이다.

 

치우천왕(蚩尤天王)

도깨비 형상과 금속사용의 역사

 

단오의 <적령부(赤?符)>와 치우천왕(蚩尤天王)

 

우리의 역사 속에서 소외된 치우천왕을 되살리는 일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는 일이자, 동북아시

아 상고사의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는 일이다. 기록 속에 등장하는 치우천왕은 주로 무신(武神)으로

나타나는데, 치우천왕에 관한 가장 다양한 기록을 보여주는 우리측 사서는 <규원사화>와 <한단고

기>이고 , 중국 측 자료는 <산해경>이다.

 

여기서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는 학자들간에 위서시비에 휘말려 있고, <산해경>은 중국에서는

고대사 연구가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재야 사학자들이 인용하는 문헌으로 인

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듯 고대사의 문헌자료에 대한 검정과 발굴성과를 통한 고대사의 정립에 발목이

잡혀있을 때, 이웃 중국에서는 우리가 잊은 상고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하고 있다.

 

일찍이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지금 세상에는 치우씨에 관하여 자세히 캐묻는 사람이 없

다. 이는 국사책이 흩어진데도 원인이 있기는 하나 후대의 학자들이 소홀히 했다는 질책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고 염려했던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여 이 글은 <규원사화>와 <한단고기>를 포함한 여러 사서와 문집에 나오는 치우천왕에 관한 기

록의 진위보다는, 그 기록들이 담고있는 상징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자 한다.

 

또,민간에 전승되는 신화나 풍속은 문자의 힘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민

속, 특히 단오풍속에 만아있는 치우천왕 연관내용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치우천왕을 찾

고자 한다.

 

먼저 단오풍속의 출발과정에서 부적의 기원이 된 치우천왕과 적령부의 관계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단오풍속인 차부적, 차륜병, 애호, 각저희 등을 통하여 오늘까지 전승되고 있는 염제신농,황제훤원

의 상징코드를 읽어, 태양의 아들인 치우천왕과 태양의 아들을 표방한 황제훤원과의 전쟁인 탁록전

쟁이 <대립이 아닌 포용과 조화의 모습>으로 단오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천문학적 접근을 통하여 살펴본다.

 

또 다양한 기록을 통해 붉은색이 가지는 벽사의 의미와 치우천왕의 상관관계에서 적색이 치우의 상

징색으로 된 연원과 치우천왕이 수행하는 군신(軍神)으로서의 기능성을 살펴보고, 끝으로 령(靈)과

룡(龍)의 문자학적 개연성을 통해 밝혀지는 치우천왕의 형상이 용으로도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통

해, 우리나라 귀면와가 적령, 즉 적룡의 형상을 한 치우천왕을 새긴 것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자

한다.

 

이와같이 적령부를 통하여 치우천왕의 실체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 신화, 민속, 문자학, 미술사학,

그리고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만, 본인은 이 글이 해답이 아

니라 나와 상고사를 연구하는 여러분께 던지는 새로운 질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면 한다.

 

박희준: 치우학회 학술위원장 글 참고.

 

그런데 여기서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위서논란부분이다 이것이 위서라고 주장하는 근

거또한 발견하기 힘이 드는데 가장 확실하게 우리가 기억하는 부분은 일제시대의 우리문화와 역사

의 말살정책에서 찾아볼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정신인 문화와 역사마져 자신 들보다 뛰어난것을 용서하지 못하고 우리역사의 모든

부분을 자신들의 역사보다 뒤로 퇴보시키는 엄청난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즉 그럼으로해서 자신들

은 우리의 문화나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자신들보다 한단계 뒤로 후퇴시켜 자신들의 역사가 우리

보다 우위임을 은연중에 현실화 시키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며 우리의 단군을 신격화 시킴으로써 우

리의 정신을 무력화 시켜 버리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자긍심을 빼앗아 버린것이다

 

또 여기에 일조한것은 바로 친일역사학자들의 역활이었다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이들의 존재는 구

관이 명관이라는 논리에 맟주어 마땅히 그 역활을 할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그 친일사학자들이 그

대로 학계에 남아 그들이 다시 후학들을 가르치니 이얼마나 아니러니 한가 그들은 결국 지금까지도

우리역사의 가장큰 걸림돌 역활을 하고 있는것이다.

 

 
참고사진

이들이 앞장서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고 위서 논쟁을 끌어내

는 역활을 하고 있으며 아직도 버젓이 우리역사를 반만년이

라고 주장을하며 심지어 이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맞추어 드

러나는 사실들 조차 위서로 내몰아 버리며 학계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것이 현실인것이다.  

고고학은 과거 인간이 남긴 물질적 흔적, 즉 유적(遺蹟), 유

구(遺構), 그리고 유물(遺物)을 통하여 인간의 과거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문헌 기록이 적거나 불확실한

상고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데 크게 기여한다. 따라서

동방 최초의 금속 사용자라는 치우에 대한 기록도 이러한

고고학 발굴자료를 통해 그 사실성이 검증될수 있다.

 

지금까지 치우의 기록을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된 발

굴조사는 없었으므로 아직은발굴자료와 연구자료가 부족하

여 치우가 생존하였던 시기의 사회상을 복원하는데 많은 제

약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헌자료를 보완할 수 있

는 많은 잠재력은 가지고 있다.

 

치우(蚩尤)가 황제(黃帝)와 겨룬 시기를 하(夏)나라 시작 연

대와 비교하면 대체로 기원전 23-24세기경의 인물로서, ?치

우가 로산의 금을 얻어 다섯가지 병기를 만들었으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史記,管子인용),?치우씨 형제들은 모두 동

두철액(銅頭鐵額)이었다..?치우때는 쇠를 달구어 병기를 만들었다..?야련을 시작한 사람은 치우이

다..?(述異記, 太平御覽) 등 수많은 금속사용 기록이 있는데, 과연 당시가 청동기 시대였을 것인지

를 고고학 발굴 성과를 통해 검증해본다.

 

인류는 기원전 7-6천년 경 근동(近東)과 소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구리제품을 사용했고, 중국의 용산

문화(龍山文化), 제가문화(齊家文化) 등과 같은 신석기시대 문화들에서 헝동과 청동을 사용한 흔적

이 발견되었으며, 감숙성(甘肅省 東鄕 林家, 馬家窯期)에서는 기원전 2천 5백년으로 편년되는 주조

(鑄造)칼이 출토된 바 있다.

 

요서지방과 내몽고 일대에서도 하가점 하층문화(夏家店下層文化)라고 불리는 청동기 문화가 방사

성 탄소연대에 의해 기원전 24세기부터 기원전 14세기까지 존재했었다. 또한 최근에는 요녕성(遼寧

省 建平縣 紅山 牛河粱) 유적에서 기원전 3천년 경에서 청동기를 제작하였다는 새로운 사실들이 밝

혀지고 있어 주목된다. 시베리아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3천년경의 아파나시예보 문화로부터 시작

된다.

 

이런 주변 상황과 유물을 비교해볼 때 치우와 황제가 서로 자웅을 겨루었던 시대는 아직은 단순한

바늘, 송곳, 칼, 장식품 등을 생산하였고, 단검이나 도끼와 같은 비교적 큰 규모의 물품은 극히 제한

적으로 사용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동기 시대에 진입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한 것 같

다.

 

현재까지의 발굴성과로는 기원전 17.8세기에 중국본토지역이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에 접어드는 것

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그러나 앞으로 활발한 발굴조사를 통해 더 많은 자료가 축척된다면 치우 시

기에도 풍부한 청동기가 사용되었음을, 그리고 치우시대 문화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선화:이화여대 박물관 관장.

 

위와 같이 우리의 역사에 대한 해석이 역사 학자들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틀리게 나온다. 그런데 본인은 치우는 신화나 문화가 아닌 사실임을 주장하고 싶은것이다. 엄연히 역사속에 존재하였고 숨쉬

고 존재하였으며 또 그렇게 이어져 지금에 온것이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사는 지금도 철처하게 왜

곡되고 있다.

 

일제시대에서 벗어나 독립이 되었던 시점에 소위말하는 역사학자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신역사관에

서 벗어나질 못하는 시각을 지닌 학자들이었고 또 그학자들이 지금도 소위 말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학자인것처럼 역사를 앞장서서 왜곡하고 있는것이다.

 

왜 우리의 역사는 부끄러운가. 그렇게 많은 침략을 받으면서 꿋꿋하게 버티어온 이민족의 저력은

그렇게 오랜 역사의 뿌리인것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하나하나 바로잡아가

야 할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후세에게 남겨줄수 있는 또하나의 재산인것이다.

                                                출처 블로그 > Network of Corea history                            

                                                원본http://blog.naver.com/knightblack/10004755048

 

붉은 악마의 마스코트 치우(蚩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에서 “나는 일찍이…북쪽으로는 탁록(?鹿)까지 갔으며, 동쪽으로는 바다까지 가고 남쪽으로는 장강(長江)과 회수(淮水)를 건넌 적이 있었다”라고 광활한 중국 대륙을 답사한 사실을 전한다.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120㎞쯤 떨어진 탁록까지 사마천이 간 이유는 그곳이 황제(黃帝)와 치우(蚩尤)의 격전지였기 때문이다. 치우는 한국 축구의 응원단인 붉은 악마의 마스코트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황제와 치우의 패권 다툼으로 시작한다. 황제는 중국 한족(漢族)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의 시조이고, 치우는 그와 맞서 싸운 인물이다. 사마천은 오제본기에서 “치우가 난을 일으켜 헌원의 명을 듣지 않았다”라고 적었지만 ‘산해경(山海經)’은 “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하였다”라고 달리 기술하고 있다. ‘사기’ 주석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이 남조(南朝) 송(宋·420~479)나라 때 배인(裵 )의 ‘사기집해(史記集解)’인데 그는 응소(應邵)의 말을 인용해 “치우는 옛날의 천자이다”라고 적고 있다.

당(唐)나라 때 장수절(張守節)의 사기 주석서인 ‘사기정의(史記正義)’는 공안국(孔安國)의 말을 인용해 “구려(九黎)의 임금 칭호가 치우이다”라고 적었다.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하북성(河北城)에 거주하던 구려족은 동이족(東夷族)의 한 갈래로서, 치우는 곧 동이족의 임금이다. ‘사기정의’는 또 치우는 “창과 칼, 큰 쇠뇌[大弩] 같은 군사용 무기를 만들어 그 위세가 천하에 진동했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구려족이 화하족보다 일찍 금속문명기에 돌입했음을 말해준다.

사마천은 이 싸움의 결과 황제가 승리했다고 적고 있지만 ‘환단고기’는 거꾸로 치우가 황제를 사로잡아 신하로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규원사화’는 황제가 치우의 금속기술을 입수해 지남차(指南車)를 만들어 공격해 전세가 역전되자 더 이상 살상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물러났다고 적고 있다. 일부에서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는 차치하고라도 ‘사기’의 기록만 가지고도 치우는 동이족의 초기 역사, 즉 고조선의 전사(前史)로 해석할 수 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 조선.06.6/9 -

 

탁록의 中華三祖堂

화하족(華夏族)의 임금 황제(黃帝)와 동이족(東夷族)의 하나인 구려족(九黎族)의 임금 치우(蚩尤)가 싸웠다는 중국 북경 서북쪽 탁록현(?鹿縣) 반산진(磐山鎭)에는 헌원로(軒轅路)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에 “황제의 성은 공손(公孫)이요 이름은 헌원(軒轅)이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헌원은 황제의 이름이다.

예부터 황제성(黃帝城) 유적이 있었다는 그곳에 중국은 1995년 귀근원(歸根苑)이란 거대한 사원을 세우고 그 안에 세 조상을 모시는 ‘삼조당(三祖堂)’을 건립했다. 세 조상이란 염제(炎帝)와 황제, 그리고 치우를 뜻한다. 염제와 황제는 예부터 한족(漢族)의 조상이었지만 치우는 황제 헌원과 맞서 싸웠던 이민족(異民族)의 대표로서 1995년 이전까지, 아니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자신들의 조상이 아니다. 그러나 치우를 조상으로 편입시켜야 “현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에서 벌어졌던 모든 역사는 중국 역사”라는 ‘동북공정’과 ‘서북·서남공정’의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에 뒤늦게 중국인의 족보에 시조로 기재된 것이다. 이는 월드컵에서 치우 깃발을 흔드는 붉은악마로서는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치우는 이미 중국인의 조상으로 환부역조(換父易祖)된 것이기 때문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중국과 조선은 고대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이니 만나면 어찌 충돌이 없으랴.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 하면, 반드시 피차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각각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때일 것이다”라고 갈파했다. 티베트와 위구르, 묘족(苗族), 백족(白族) 등의 소수민족 영토를 대상으로 전개했던 서북·서남공정의 목적은 모두 달성되어 중국 역사의 일부가 되고 중국 영토의 일부가 되었다. 문제를 제기할 국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북공정은 한강 이북의 북한 영토까지 중국역사라고 주장하는데, 이런 심각한 역사 침략에 대해서 ‘주체의 나라’ 북한은 묵묵부답이다. 동북공정이란 역사전쟁 다음의 수순이 무엇일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이런 이웃을 곁에 둔 우리로서는 잠시도 방심할 수 없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