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의 역사에서 배운다] 영악한 일본…19세기 정세
꿰뚫어
조선은 무지로 주권 포기, 국론 분열로
망국의 길 가 |
한국과 미국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본격 진행되면서 전국이 몸살을 앓고 있다. 국민의 여론을 수용하지 않은 채 일방적인 일정을 짜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정부, 이에 반발한 농민·노동자·시민단체의 격렬한 저항. 일각에서는 현 상황을 “시장 개방에 따른 내전 상태”라고 규정한다. 시장 개방에 따른 내전? 과거에도 그런 적이 있었나? 있었다. 딱 한 차례. 19세기 중반 서양 외세의 개방 압력을 받고 나라는 개국파와 쇄국파로 나뉘어 홍역을 치렀다. ‘내전’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한·미 FTA 협상을 보며 19세기를 떠올린다. 그때 그 시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천근(千斤)의 무게로 새알을 누르듯 보잘것없는 오랑캐를 쉽게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화도조약을 앞두고 개국파인 개화파와 쇄국파인 위정척사파가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위정척사파인 윤치호가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했던 말이다. 일본의 흑선이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문호 개방을 요구하자 개방 반대를 주장하며 “차라리 전쟁을 하자”고 했던 것이다. 조선의 군사력으로 얼마든지 일본을 격퇴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모르면 용감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윤치호의 이 말은 이후 조선의 자신감을 나타내 주는 상징보다는 세계 정세에 대한 조선의 무지를 알려주는 사례로 자주 쓰인다. 당시 조선은 말 그대로 외우내환(外憂內患)의 위기였다. 안으로는 왕비의 집안인 외척(外戚)이 중앙 권력을 장악한 세도정치로 균형을 잃었고, 그 틈을 타고 양반 세도가들이 민중에 대한 가렴주구를 계속함으로써 민중 반란이 심각한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서양 오랑캐’들이 교역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졌고, 마침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이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조선 조정이 외세와의 일전에 자신감을 갖는 것이 전혀 근거 없는 일은 아니었다. 1875년 강화도 앞바다에 일본이 서양 배를 몰고 위협하기 전 이미 두세 차례 서양 군대를 몰아낸 경험이 있었다. 1866년 조정은 대동강에서 미국을, 한강에서 프랑스를 제압한 적이 있었다. 1871년에는 또 한 차례 미국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당시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 나라들은 중국과 일본에서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다. 큰 이득을 줄 것으로 보이지 않았던 조선에 힘을 쓸 경황이 없었다. 그저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배들이 표착했을 때 선교사 처리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팠고, 다른 나라가 먼저 차지할까봐 걱정이 됐을 정도였다. 서양 열강들은 힘들이지 않고 조선을 개국시키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 악역을 일본이 맡았던 것이다. 일본은 1854년 미국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후 서양화에 힘쓰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기회를 잡았다. 영악했던 일본은 수년 사이 세계 정세를 꿰뚫고 서양식 ‘조약’의 의미를 파악했다. 조선을 개국시키면 서양 열강의 도움을 받아 조선과 중국에서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일본이 조선 개국에 총력을 기울였던 이유였다. 그렇다면 개국은 잘한 것일까? 거기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는 어렵다.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역사가들은 “개국은 불가피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개국 방식이었다. 어차피 해야 할 개국이었다면 우리 힘으로,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이 잘못된 것이다. 당시 개국은 우리가 주도하지 못했다. 철저히 다른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니 조약 내용이 우리에게 유리할 리 없었다. 경제적 파탄과 국론분열로 나라는 초토화됐고 민란과 군란, 전쟁이 이어지면서 결국 조선은 일본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것이 청이었다. 청은 잘 알려진 대로 주변국들로부터 조공을 받던 세계 최강국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급속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서양 열강들과의 몇 차례 전쟁에서 지며 주변국들은 열강의 세력권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버마, 티베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이 속속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게다가 남쪽의 조공국 류큐(현 오키나와)는 소국으로만 여겨지던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다. 조선은 중국을 ‘제국’으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조공국이었다. 또 동쪽으로부터의 러시아 진출을 막아주는 완충지대였다. 당시 청의 실력자 이홍장이 “조선은 청과 순치상의(脣齒相依:입술과 이가 서로 의존함) 관계”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청과 조선은 입술과 이의 관계” 하지만 청은 조선을 지킬 힘이 없었다. 누군가가 결국 조선을 개국시킬 텐데 그게 누가 좋을까를 생각했다. 결과는 일본이었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은 대만을 침략해 좋은 감정은 아니었지만 러시아나 영국 등 서양 열강보다는 다루기가 쉬울 것으로 봤다. 특히 러시아가 조선을 장악할 경우 청은 완전히 서양 열강에 포위당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청은 조선의 개국 전략을 세웠다. 쇄국주의자였던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과 민비, 그리고 외척인 민씨 일가의 정권 장악을 뒤에서 조정했다. 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청은 조선 조정을 통제했다. 이홍장은 당시 세자책봉 문제로 청에 와 있던 영의정 이유원을 통해 조약 체결을 권했다.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몇 차례 서신을 보냈다. 서신에는 “작은 화를 참고 일본 사절을 예로 접대하고 일본 선박을 공격한 이유를 밝혀 의심과 원한을 풀도록 하라”는 내용도 있다. 결국 우리의 첫 시장 개방은 철저히 남의 나라 이익에 따라 체결된 것이다. 내용은 당연히 불평등하다. 거류지 설정, 영사재판권 등 일본이 구미의 강권에 의해 체결됐던 불평등 조약 내용이 그대로 들어갔다. 그런데 몇 걸음 더 나아갔다. 개항장으로부터 40km 이내의 내지 통상권을 허락하면서 나라 경제 전체가 급격한 혼란에 빠졌고 일본 화폐 사용과 무관세 조항 등은 우리가 주권을 스스로 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약과 개국에 반대파와 찬성파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며 국론은 분열됐다. 급격한 경제 변동으로 민생은 도탄에 빠졌고,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주변에 맹수들이 가득한데 자중지란을 일으키면 결과는 뻔했다. 조약 체결 30년 만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계 경제에 대한 무지와 제대로 알지도 모른 채 밀려서 체결한 조약, 내부 투쟁만 하다가 부랴부랴 빗장을 연 시장 개방이 주는 대가는 크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
'일반경제기사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망대] 경기 정점 지나 하강 국면으로 (0) | 2006.08.08 |
---|---|
[스크랩] "한미 FTA로 축산 최대 1조 원 피해" (0) | 2006.08.05 |
나는 이렇게 본다] FTA 협상 정치논리로 해결 안 된다 (0) | 2006.07.25 |
[대통령은 왜 안 나서나] 협상 지휘할 컨트롤 타워가 없다 (0) | 2006.07.25 |
[김종훈 수석대표의 고뇌] 원군 없이 싸우는‘고독한 전쟁’ (0) | 2006.07.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