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경영] 인사가 만사 반대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둬라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탁월한 용인술…사소한 자리도 늘 능력 따져 임명 |
승진해서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사람도 있지만 물을 먹고 분루를 삼키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게 인사인 것이다. 자칫 인사에 불만을 품는 사람이 늘다 보면 조직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물론 민심 이반으로 조직원들이 회사를 떠날 궁리만 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군수를 참판으로 파격 발탁 그러한 위험을 막기 위해 인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름지기 ‘소신’과 ‘원칙’이다. 인사권자가 변함 없는 소신을 가지고 예측 가능한 원칙에 따라 인사를 한다면 내부 불만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조 제9대 임금 성종의 용인술은 후세의 리더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느 날 성종은 한 지방 수령이 훌륭한 정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사람이 크게 쓸 수 있는 인물임을 알아보고 서울로 뽑아 올려 집의(執義)로 삼았다. 집의란 사헌부의 종3품 직제로 정사를 비판하고 관리들을 규찰하며 풍속을 바로잡는 ‘끗발’ 있는 벼슬이었다. 이에 사헌부를 비롯해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가 모두 나서 번갈아 임금에게 글을 올려 불가한 인사임을 고했다. 그러자 성종은 며칠 뒤 그 사람을 승진시켜 이조 참의(參議)를 시켰다. 정3품 당상관직인 참의는 오늘날 차관보에 해당하지만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면서도 판서와 대등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삼사에서 또다시 극력 반대하자 며칠 만에 다시 종2품인 이조 참판으로 승진시켰다. 지방 군수가 갑자기 행정자치부 차관으로 승진한 것이다. 삼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반대 상소를 그치지 않으면 정승 자리에까지 올라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예로만 보자면 성종이 여론을 무시하고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인사권을 행사한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종 인사의 기본 원칙은 능력 있는 사람을 중용한다는 것이었다. 성종은 고집을 꺾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인사 원칙을 과시하고 신하들의 틀에 박힌 사고를 꼬집은 것이다. 결과는 해피엔딩이다. “그 사람은 후에 정승이 되었으며 과연 그 재능이 직무에 알맞았으니 이로써 나라 사람들은 임금이 사람을 잘 알아보는 데 감복했다”고 선조 때 문신 차천로는 저서 『오산설림(五山說林)』에 적고 있다. 성종은 또 예문관 교리 최한정을 성품이 착하고 근면하다 하여 후한 대접을 했다. 이에 종친 보성군의 사위인 승지 임사홍이 그를 시기해 “최한정은 나이가 많아 적합하지 못합니다”하고 아뢨다. 그러나 임금은 한마디 대답 없이 어필로 최한정의 이름을 쓰고 등급을 뛰어 대사헌으로 임명했다. 임사홍은 황공해 어찌 할 바를 몰랐고 배경을 믿고 권세를 부리던 임사홍을 미워한 신하들은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고 전한다. 성종은 능력 있는 신하를 발굴하기 위해 늘 신경 썼다. 그는 경연을 마친 뒤 반드시 편전에 나와 여섯 승지들로 하여금 각기 관할 관청의 업무 보고서를 해당 관원들을 거느리고 와 제출하게 했다. 이어 승지·관원과 더불어 보고서를 면밀히 검토한 뒤 그것이 옳지 않으면 물러가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게 하고 옳으면 꼭 “이것이 당상관의 의사인가, 해당 관원의 의사인가”하고 물었다. 훌륭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놓아 다음 인사에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쓴소리하는 신하에겐 포상 수령들이 부임할 때도 반드시 따로 불러 독대하며 먼저 출신 내력과 친족, 교우 관계를 묻고 다음엔 업무 처리 방법과 군졸 다루는 법, 백성을 다스리고 외적을 방어하는 방법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이에 생각을 잘 정리해 조리 있게 답하는 사람은 칭찬과 함께 단계를 뛰어넘어 승진시켜 주고 업무 파악이 안 돼 있는 사람은 임명 취소는 물론이고 그를 천거한 사람까지 죄를 주었다. 측근에 있는 신하들이나 외국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이에 따라 지방관으로 부임할 사람이 자기가 그 임무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면 병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감히 부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성종이 신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인사의 전횡을 휘두른 것은 아니었다. 사리에 맞고 이치에 닿는 지적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하루는 누이인 명숙공주가 성종에게 남편 홍상의 숙부가 장흥부사가 됐으나 아내가 병이 나 부임하기 어려우니 본직을 갈아달라고 부탁했다. 성종은 청을 받아들여 그를 경직(京職)에 임명했다. 이에 대사간 손비장 등이 “사사로운 정 때문에 국법을 무너뜨릴 수는 없으니 기한을 정해 쓰지 마소서” 하는 차자를 올렸다. 임금은 친히 편지를 써서 답했다. “대사간의 말이 대단히 바르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번 일은 사정(私情)이요 공정한 것이 아니니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오. 과실을 듣고 곧 고치는 것은 또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대들이 능히 그 직무를 다하니 나는 이를 매우 칭찬하노라.” 이처럼 성종은 아첨하는 신하보다는 본분을 잊지 않고 바른 소리를 하는 신하를 아끼고 우대했다. 그러한 철학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예가 있다. 성종이 생부를 덕종으로 추존한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까지 한 것은 올바른 예가 아니었다. 성종이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삼사가 모두 반대했으나 이승소 혼자 장황한 상소를 올려 찬성했다. 덕분에 성종이 뜻을 이룰 수 있었으나 속으로는 이승소의 아첨을 그릇되게 여겨 그를 높이 쓰지 않았다. 이승소는 벼슬이 2품에 그쳤을 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사헌부 지평 김언신이 성종이 총애하는 이조판서 현석규를 소인이라 비판했다. 성종은 “의정부와 이조에 두루 물어서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네가 임금을 속인 죄를 받겠느냐”고 물었다. 언신은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극형을 받겠다고 아뢨다. 그런데 의정부와 이조에서는 모두 현석규가 소인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분노한 임금이 언신을 의금부에 가뒀으며 의금부에서는 기망률로 곤장 100대에 도형 3년으로 죄를 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임금은 약속대로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동중추 김뉴가 소를 올려 임금의 잘못을 지적했다.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입니다. 하는 말이 전하에게 미치게 되면 전하께서 얼굴 빛을 고치시고, 논하는 일이 의정부에 관계되면 재상도 처분을 기다리게 됩니다. 지금 석규가 군자인지 소인인지는 신이 모르겠으나(…) 언신은 미관으로서 마음속의 생각을 그대로 전하의 엄한 위엄 앞에 감히 다투었으니 말은 비록 맞지 않았더라도 옛 사람의 강직한 기풍이 있습니다. 마땅히 이를 표창하여 선비들을 권장해야 될 터이온데 도리어 죄를 주게 되니 신은 앞으로 대간의 마음이 풀어질까 염려됩니다.” 자기 일에 충실한 신하 등용 성종은 “내가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고 물리친 뒤 언신을 대궐 뜰에 불러놓고 꾸짖었다. “임금을 속인 것은 마땅히 죽을 죄다. 너는 지금도 석규를 소인이라 하겠느냐. 아니면 네가 말한 것이 그릇됐다 하겠느냐.” 하지만 김언신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오히려 왕의 잘못을 지적했다. 성종은 노여움을 풀고 술까지 하사하며 그를 칭찬했다. “내가 어찌 간하는 신하를 죽이겠느냐. 옛날 당 태종이 처음에는 간하는 말을 잘 듣다 뒤에 가서 점점 그렇지 못했던 일을 본받지는 않을 것이다. 너는 말할 만한 일에 대해 있는 말을 다 하라. 네가 강개해서 끝내 굴하지 않는 것을 나는 매우 칭찬한다. 가서 너의 직무를 보라.” 성종의 분노는 김언신의 기개를 시험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민 것이었다. 성종은 이처럼 인재를 적재적소에 기용하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일을 맡겨 놓고도 맡은 바 임무를 다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또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신하들을 고무하고 격려한 것이다. 세종과 세조 대에 개화한 조선의 문물이 성종 시대에 이르러 완성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뛰어난 용인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
이훈범 중앙일보 논설위원 (cielbleu@joongang.co.kr) | [895호] 2007.07.02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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