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경제기사모음

‘영원한 제국’엔 영혼이 살지 않는다

도일 남건욱 2008. 3. 2. 10:26
‘영원한 제국’엔 영혼이 살지 않는다
관료왕국 벽을 깨라
이명박 당선인 60년 된 ‘전봇대’ 뽑기 앞장…강력한 저항 뿌리쳐야 성공
드디어 이명박 정권과 관료의 전쟁이 시작됐다. 그 결과는 대한민국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명박 당선인은 과연 이 시대 ‘걸림돌’인 관료주의를 깨부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관료들의 저항에 굴복할 것인가. 우리 모두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철옹성 ‘관료왕국’을 헐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선진국 문턱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3일 오후 1시. 정부 과천청사에서 만난 한 고위 공직자는 기자에게 “오늘 정부 1청사에서 3시에 조직개편 관련 중앙부처 회의가 열리니 어서 가봐라. 아마 출입기자들도 모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회의장 출입은 안 되겠지만, 불만들이 많으니 후속 취재는 잘될 것”이라고까지 말해줬다.

실제로 세종로 행정자치부 19층 대회의실에는 100여 명의 각 중앙부처 인사담당 과장이 모여들었다. 긴장된 표정들이 역력했다. 사실상 부처별 감원 폭이 결정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회의는 아예 문을 잠그고 진행됐다.

회의장 안에서는 ‘당부한다’ ‘부탁한다’ ‘이해해 달라’는 등의 말이 새어 나왔다. 1시간으로 예정된 회의는 거의 2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끝났다. 회의 도중 밖으로 나와 상부에 보고하는 공무원도 많았다. 회의가 끝나고 회의장 밖을 나오는 공무원들은 모두 심각한 표정이었다.

한 부처 과장은 “당장 내 밥줄을 걱정해야 할 지침이 나왔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공무원은 옆 동료에게 “이게~ 도대체 뭐 하자는 짓이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행정자치부가 주도해 전 중앙부처에 하달된 이날 지침은 통합되는 부처 중 중복되는 인력은 10% 감축하고, 총무·관리와 같은 지원부서 인력은 75%까지 줄인다는 내용이었다.

또 각 부처 일반사업 부서의 정원 인정 비율을 90%로 정해 부서별로 10%씩 일괄적으로 줄인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대략 7000여 명의 공무원이 감축되는 효과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생존하려는 공직사회는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도장 찍지 않겠다”고 했지만, 몽니로 비칠 뿐이다.

‘전봇대’ 하나가 상황을 급반전시켰다. 이명박 당선인이 대불공단의 전봇대 사례를 지적하기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공무원 사회 동요를 의식해 ‘공무원 수 동결’을 내비쳤다. 하지만 이 당선인의 ‘전봇대 발언’ 이후 ‘규제로 점철된 케케묵은 관료주의를 타파해야 한다’는 여론에 힘입어 정부조직 혁신 작업에 가속도가 붙었다.

이명박 당선인이 “공직자가 이 시대의 걸림돌”이라고 표현한 것은 신호탄이었다.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마음의 전봇대가 문제”라며 관료집단의 무사안일과 복지부동에 직격탄을 날렸다.

MB, “공직자가 이 시대 걸림돌”

관료 권력의 산물인 ‘규제’와 관련해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파격안까지 나왔다. 인수위는 행정자치부를 통해 전 중앙부처에 ‘경제규제 50건당 공무원 1% 감축’ 지침을 내려보냈다. 새 정부의 규제 철폐 의지를 상징할 뿐 실현성은 없다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지침대로라면 관료들은 ‘달콤한 규제’냐 ‘쓰디쓴 감원’이냐를 택해야 한다.

물론 규제를 유지하기 위해 감원을 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관료사회의 속성이고, 이명박 당선인이나 인수위는 그 속성을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이다.

그렇다고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항할 것이다. 언론이나 국회 로비를 통해 “부처나 규제의 성격을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규제 건수에 따라서 공무원의 수를 줄이는 것은 문제”라는 여론을 형성하는 것은 관료들의 오랜 노하우다.

이명박 정부가 내세우는 ‘작은 정부’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사실 하루이틀 얘기도 아니다. 역대 정부는 출범할 때마다 정부조직을 개편하고, 작은 정부를 내세웠다. 하지만 임기가 지나면 ‘요요현상’이 일어났다.

관료들의 논리에 따라 정부는 비대해졌고, 새 정부는 다시 줄이고 다시 뚱뚱해지는 일을 반복했다. ‘공무원은 가만히 두면 늘어나게 돼 있다’는 파킨슨의 법칙이 한국만큼 잘 지켜진 경우도 드물 것이다.


관료는 언제나 강하다?

엘리트 관료들은 탁상에 앉아 민간을 지휘, 관리, 감독했다. 그들에겐 법령이 있었고, 그들 책상 수가 늘어날수록 대한민국은 규제천국이 됐다. 보장된 정년을 깔고, 규제와 권위로 민간 위에 군림했던 관료들은 시대 흐름도 읽지 못했다.

종종 내부 고발과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고시 기수와 혈연·지연·학연으로 똘똘 뭉쳐 ‘가장 똑똑한 집단이라는 착각에 빠진’ 관료사회는 절대 기득권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대통령과 개혁 장관에게 비수를 꽂기도 했다. 그렇게 그들은 ‘이 시대의 걸림돌’이 돼 갔다.

인수위 핵심 관계자는 “이번엔 얘기가 다를 것”이라고 확언했다. “이명박 당선인의 관에 대한 불신과 철학을 볼 때 아마도 임기 내내 관료 개혁과 규제 타파가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새 정부의 정부조직 개편 강도를 보면 ‘이번에는~’이라는 말이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료조직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역사가 증명한다. 100년 전 막스 베버가 비판한 관료제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적용된다.

새 정부도 임기 중 후반에는 ‘관료의 역전승’을 참담히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을지 모른다. 그래서 초기 1년이 중요하다. 정부조직을 바꾸고 공무원 수만 줄여서 될 일은 아니다. 역대 정부가 모두 써봤던 수법이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혁신이 뒷받침돼야 한다. 일본처럼 고위관료의 보루인 ‘1종 공무원 시험(우리나라 행정고시에 해당)’ 폐지를 밀어붙이거나, 심지어 공무원법상 보장된 ‘공무원 정년 보장’ ‘천편일률적인 보수체계’까지 혁신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김태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남긴 말은 인수위가 되새겨봄 직하다.

“돌팔이 의사는 환자가 어느 정도 가려낼 수 있지만, 돌팔이 관료는 5년 임기의 정권이 제대로 가려내지 못해 다음 정권에서까지 잘못된 행태가 반복되곤 한다.”

대한민국 관료들은 역대 가장 강력한 적수를 만났는지 모른다. 관료의 ‘을(乙)’이었다가 ‘갑(甲)’이 돼 돌아온 이명박 당선인은 관료들을 걸림돌로 보고 있다. 관료왕국은 무너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