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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뺐지만 체질개선은 실패

도일 남건욱 2008. 3. 2. 10:28
살 뺐지만 체질개선은 실패
일본의 정부조직 개혁
2001년 정부 축소 대수술…권한 몰려 관료의 힘 되레 세지기도

▶‘개혁을 멈추지마’.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전 총리의 개혁에 대한 고집이 자민당의 기록적인 압승을 이끌어 냈다. 사진은 총선을 하루 앞둔 2005년 9월 10일 도쿄에서 개혁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장면.

지방흡입술을 했다고 평생 날씬하게 살 수 있을까. 식습관과 운동량을 조절하지 않으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일본은 2001년 22개에 달하던 성청(省廳)을 12개로 줄이는 대수술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 수술로도 100년 넘게 이어 온 관료의 나쁜 습관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요즘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다이내믹’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정부조직 개편안도 발표됐더군요. 대장성을 없앴던 일본정부 조직개편이 떠올랐습니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1월 16일 현재 56개인 중앙 행정기관을 43개로 줄이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한 며칠 뒤 만난 주한 일본대사관 바바 세이지 경제참사관의 말이다.

그의 말처럼 이명박 정부의 조직 개편안은 2001년 이후 진행된 일본의 정부개혁과 닮아 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1월 1일 대통령직인수위 시무식에서 “일본의 대장성 개혁에 감탄했다”며 이번 정부조직 개편이 일본을 벤치마킹한 것이라 밝힌 바 있다.

일본은 2001년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재직 당시 모두 22개에 달하던 성·청을 12개로 줄이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총리를 제외한 각료 수도 20명 이내에서 17명 이내로 줄였다. 이때 일본을 대표하는 권력기구 ‘대장성’은 13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재무성’이란 이름으로 바뀌었다.

대장성은 금융 행정과 기획 등 핵심 기능을 금융청(내각부의 외청)에 내주었으며, 기존 예산 배분 등에 대한 영향력만 유지한 채 예산 편성권도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넘겨야 했다.

바바 세이지 경제참사관은 “한국에서도 일본처럼 정부조직을 간소화한다면 의사결정 과정이 빨라지고 효율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며 “그러나 이것이 꼭 ‘작은 정부’로 가는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일본의 외무성, 대장성, 통산성, 경제기획청 등 4개 부처가 정부개발원조(ODA)를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결정기관이 세 곳입니다. 그러면 예전에 4곳으로 나눠졌던 권한이 3곳으로 나눠지게 되는데, 관료의 힘이 좀 더 집중되겠지요.”

그는 “핵심은 규제 자체를 줄이는 것”이라며 “규제가 줄어들지 않으면 민(民)은 정부 규모 축소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규제, 곧 권한을 예전보다 적은 관료가 나눠가진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어느 일본 관료 한 명의 의견이기만 할까. 2007년 7월 16일자 일본의 대표적 경제주간지인 닛케이 비즈니스는 ‘다시 관료왕국으로’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요지는 이렇다.

규제 줄이지 않으면 하나마나

‘관(官)에서 민(民)으로, 작은 정부’.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개혁이 진정한 ‘관료국가와의 결별’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 수치상으로는 고이즈미 총리 취임 초기인 2001년 GDP의 24.1%를 차지하던 공공부문 비율이 퇴임 직후인 2005년에는 22.9%로 줄어드는 등 변화가 있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규제나 관료들의 군림하려는 행태엔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잡지는 관의 지배력이 아직도 건재하고 확대되고 있다며 이른바 ‘인증 비즈니스’의 예를 들었다. 2006년 11월 아베 신조 전 총리 정권이 출범한 직후 농림수산성의 관료들은 ‘올바른 일식 전통요리(와쇼쿠·和食) 전문점’을 구분하는 인증제를 도입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해외의 일식 전통요리 전문점은 무려 2만 곳 이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제기됐다.

“전문 감찰원들을 보내 해외 일식당을 조사하는 데 드는 비용,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포스터를 만드는 것에 대해 불신감이 든다.” “외국에서는 그다지 실시하지 않는 요리문화를 식별한답시고 직접 국가가 관여하는 것은 과연 어떤가. 민간이 주체가 돼 하는 것이 기본 아닐까.”

이때 해외 언론에서 ‘스시 폴리스’라며 이 제도를 보도하자 농수산성은 서둘러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난해 3월 ‘인증’이 아닌 ‘추천’이라고 수위를 낮춰 이 제도를 만들게 됐다. 인증제가 시행됐다면 2007년 예산만 2억7000만 엔이 드는 일이었다.

규제 일변도의 ‘관료적 행태’ 대해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의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본의 관료주의가 이렇게 심각해진 이유는 머릿속이 법률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이 일본 관료사회에서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구조 때문이다. 일본의 관료주의를 바로잡으려면 지금까지 법률직에 편중되어 있던 관료채용부터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떤 사람을 채용해야 할지, 관료채용의 기준 자체에 대해 국민 쪽에서 좀 더 강력한 요구를 해야 한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관료들에게만 채용기준에 관한 결정권을 맡겨두면 관료들은 자기들과 같은 타입의 사람만 채용해 계속 일본식 관료주의자를 배출할 뿐이다.”

관료와 정치인 부적절한 고리 끊어야

이 책이 쓰인 것은 개혁이 진행되던 2002년의 일이다. 5년여가 지난 현재,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자문기구인 ‘공무원제도 종합개혁자문회의’에서는 한국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 1종 시험과 일반 공무원을 뽑는 2종 시험을 폐지, 종합직·전문직·일반직으로 구분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1종 시험에 합격하면 이른바 ‘커리어(career) 관료’로 분류돼 자동적으로 고위직까지 승진하는 폐단을 막기 위해서다. 또 향후 10년간 공무원과 민간인 출신의 비율을 최대 6 대 4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개혁이 시작된 지 7년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체질개선에 들어간 셈이다.

습관을 바꾸고 체질을 개선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본 자민당은 1월 22일 후쿠다 총리가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정치인·관료 접촉 금지 법안’을 포기했다. 이 법안은 정치인이 지역구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공무원을 움직이고, 공무원은 그 대가로 ‘감투’를 보장받는 구조를 근절하기 위해 추진됐지만 자민당 의원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또 낙하산 인사의 보루였던 독립행정기관의 민영화도 주무 부처의 로비와 반발로 실패했다. 당초 개혁 대상은 102곳이었으나 16곳만 최종 리스트에 올랐을 뿐이다. 그나마 폐지는 3곳에 불과하며 이 3곳도 정부가 100% 출자해 사실상 바뀐 것이 없다. 나머지 10곳은 간판만 바꿔 달았다.

관료가 로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정치인이다. 『일본 관료사회의 실체』의 저자 이호철 주일 한국대사관 경제참사관은 관료와 정치인의 메커니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허가권, 감독권 등을 가지고 있는 관료는 민간보다 우위에 있지만 민간은 투표권을 행사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입법 및 주요 정책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가진 정치가는 관료에게 힘을 휘두를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선거 때마다 각 성·청이 동원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 참사관은 책에서 “선거철이 되면 ‘관청 정치부’라는 말이 은근히 돌고 있다. 물론 관청 내에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부서는 아니다. 이는 자기 관청 출신자들을 정계에 진출시키기 위해 성·청 내 선거운동을 하는 부대를 일컫는 단어”라고 설명했다.

개혁 후 7년, 그동안 정-관의 부적절한 고리가 과연 끊어졌을까. 비대해진 관료왕국이 관료만의 책임일까. 일본의 사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