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고객은 영원한 ‘을’
자기 금고부터 채우나 이자수익이 전체 80%나 … 서비스 만족도 아시아 평균에도 못 미쳐 |
예대마진이 이자이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2000년부터 은행 전체 수익에서 이자이익의 비중이 80%를 넘었다. 나머지 20%는 수수료 이익과 신탁이익을 포함한 비이자 수익이 채우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은행들이 고객들에게 돈 장사를 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난해 금융업종 시가총액은 150조원이다. 2000년 34조원에서 무려 다섯 배가 커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07년 국내 은행의 당기순이익은 15조170억원으로 전년보다 1조4439억원 늘었다. ‘빅3’로 손꼽히는 국민·우리·신한은행은 사상 최대의 순익을 올렸다. 저축은행들의 성적도 나쁘지 않다. 2007년 하반기에 영업이익 2조9906억원, 순이익 3115억원을 벌어들여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각각 7.6%, 37.3%씩 늘었다. 총자산도 57조9050억원으로 전년 대비 2조1000억원 증가했다. 하지만 은행의 거대한 몸집만큼 고객 만족도가 높은지는 의문이다. 수익 위해서라면 고객도 뒷전 컨설팅 업체 맥킨지가 실시한 금융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의 금융서비스 만족도는 77%다. 절대적 수치만 보면 높은 듯하지만 선진국 평균인 91%, 아시아 평균인 89%에 훨씬 못 미친다. 또 응답자의 51%는 작은 금리 차이에도 거래 은행을 바꿀 의사가 있다고 답했고 ‘은행이 내 금융 니즈(needs)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답한 소비자는 39%에 불과했다. 은행들이 소비자의 니즈를 묻기 전에 제 수익부터 챙기는 탓이다. 노무현 정부 때 주택시장을 규제하면서 주택담보대출이 크게 줄었다. 은행은 중소기업대출을 늘려 자산확대 경쟁에 들어갔다. 거기다 지난해 고수익 상품인 증권사 CMA로 예금이 대거 옮겨가면서 은행들은 금리가 높은 특판예금을 판매하고, 금융채를 발행해 빈 자산을 메웠다.
순이익에도 허수가 있다. 수치는 늘었지만 LG카드·SK네트웍스 등에 출자전환한 주식을 매각해 얻은 이익 3조4000억원을 빼면 실제 장사를 해서 번 순익은 11조6542억원으로 2006년보다 오히려 줄었다. 커진 외형만큼 내실경영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일시적인 자금 확보 대책은 고객들에게 고스란히 ‘이자 부담’으로 돌아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은행의 양도성예금증서(CD) 발행액은 총 27조7711억원으로 2006년 11조3709억원 대비 144%나 증가했다. CD금리는 지난해 초 4.87%에서 지난해 말 5.82%까지 올랐고, CD금리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주택담보대출 금리도 따라 올랐다. 은행 고객이 2억원을 대출한다고 가정하면 2005년 6월(연 5.9%)에 1180만원이었던 연 이자가 2007년 12월(연 7.25%)엔 1440만원으로 오른 것이다. 올해 초 불안정한 증시에 시중자금이 다시 은행으로 돌아오자 은행들은 예금 금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국민·신한·하나·SC제일은행은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를 각각 0.9, 0.7, 0.7, 0.5%포인트씩 내렸다. 자금난을 벗어났으니 고객들에게 높은 예금 금리를 지급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가양동에 사는 P씨는 “은행들이 CD를 마구 발행해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잔뜩 올려놓고 이제 와서 ‘나 몰라라’ 하는 식”이라며 “이렇게 고객을 외면해도 되는 것이냐”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두고 “이자이익에 의존하는 수익 구조 때문”이라며“비이자 수익을 늘리는 등 수익구조를 다각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은행들도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을 앞두고 다양한 수익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국내 은행 이자이익은 31조1858억원으로 전년보다 5.8% 늘어난 반면 비이자 이익은 10조7901억원으로 45.1%나 증가했다. 금융권의 수익 경쟁이 점점 심화하는 상황에서 예대마진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수익 통로를 개발하는 것은 은행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국내 은행의 비이자 이익은 수익증권, 보험, 펀드 판매 수수료가 주를 이룬다. 국민은행의 지난해 펀드 판매 수수료 이익은 4694억원으로 전년보다 두 배 늘었고, 신한은행도 2006년 1575억원에서 지난해 3368억원으로 증가했다. 문제는 비이자 수익을 늘리는 데 급급해 고객을 등한시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신인석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 등 5명이 증권사 2곳과 시중은행 1곳의 펀드 가입 고객 900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를 보자. 이 결과에 따르면 펀드에 가입하는 고객들은 펀드 관련 정보를 얻는 데 판매사 직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인터넷이나 주변 사람들의 조언보다 1점 가까이 높게 나타났다(1~5점 척도). 또 응답자의 20.7%가 본인이 가입한 펀드의 운용사와 판매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고 답했다. 신 교수는 이와 관련해 “투자자의 이익이 침해될 잠재적 위험이 크다”며 “판매사의 서비스 내용과 질에 대한 투자자 보호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보험상품도 마찬가지다. 국내 은행이 지난해 보험 판매로 거둔 수수료 수익은 6000억원 정도다.
중간 간부급의 한 은행원은 “솔직히 펀드나 보험상품 약관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직원도 많다”며 “영업점마다 수익을 올리는 데 혈안이 돼 있다”고 말했다. 이어 “소위 말하는 부자 고객을 상대하다 보면 일반 고객 한 명 한 명을 정성스럽게 대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책임감 없이 무조건 은행원에게 의지하는 고객들도 반성해야 한다”며 현장의 고충을 털어놨다. “책임감 없는 고객들도 문제” 은행이 대출해 주는 조건으로 다른 금융상품을 끼워 파는 일명 ‘꺾기’ 판매도 문제다. 창구를 가운데 두고 고객은 ‘을’이 되기 십상이다. 지난해 8월 생·손보협회가 한국갤럽에 의뢰해 조사한 ‘방카슈랑스 판매실태 조사’에서 응답자의 22%가 대출을 위해서 은행의 보험상품에 가입한다고 대답했다. 대출이 급한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그 비율이 31.3%나 됐다. 밥그릇 챙기기는 끝이 없다. 현재 고객은 주택담보대출액의 0.7% 정도를 근저당권 설정비로 내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를 부당한 거래로 보고 오는 5월부터 근저당권 설정비 일부를 은행이 부담하도록 했다. 그렇게 되면 은행은 연간 4억원 정도의 돈을 더 쓰게 된다. 은행들은 근저당권 설정비를 부담할 경우 이를 대출금리에 반영할 수밖에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은행의 자산 확대와 대출 자금 마련에 고객이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고객’이라는 편리한 가면에 은행들이 ‘역공격’을 당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금융계 연구원은 “은행, 증권, 보험 등 여러 업종을 움켜쥐고 있는 현재의 금융지주회사 체계가 문제라면 투자은행(IB) 등 한 가지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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