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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상상으로 ‘돈다발 콸콸’

도일 남건욱 2008. 3. 30. 04:35
창조적 상상으로 ‘돈다발 콸콸’
쑹커 ‘타이허마이톈’ 사장
콜러링 마케팅으로 일약 음반업계 강자 … 어렸을 땐 싸움질만 하는 망나니

‘상상하는 대로 이뤄진다’. 이건 최근 어떤 30대 주식 부자가 주장한 얘기다. 고개를 끄덕인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상상하면 마음에 절로 즐거움이 생기고, 그 즐거움은 곧 상상하는 대상을 향한 자신감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보자. 과연 ‘상상만 하면’ 모든 게 이뤄질까. 중국 엔터테인먼트계의 강자 쑹커(宋柯·43)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그는 ‘상상’이란 두 글자 앞에 ‘창조적’ 이란 형용사 하나를 넣자고 고집한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내가 만일 빌 게이츠처럼 그림 같은 대저택에서 살기를 상상한다고 가정해 보자. 과연 그렇게 이뤄질 수 있을까? 물론 그리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 가능성이 백 배, 천 배나 클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상상은 창조성이 너무 빈곤하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상상이야 말로 자신을 바꾸고, 세상도 바꾼다.”

베이징(北京) 타이허마이톈(太合麥田)음악문화발전유한공사. 현재 중국 음반계를 호령하는 강자다. 스타의 산실이기도 하다. 마이톈의 전략이 바로 창조적 상상이다. 쑹커 사장의 경영방침이기도 하다.

마이톈의 주특기는 당연히 음반이다. 그 자산은 바로 사장 쑹커다. 쑹 사장은 칭화(淸華)대 환경학과를 졸업한 수재다. 그러나 그는 대학 시절 날리던 싱어송라이터였다.

당시 대학생치고 쑹커를 모르면 간첩으로 통했다. 가는 곳마다 그는 팬이 넘쳤다. 그의 노래는 지금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지금 대학가의 싱어송라이터 대부분은 여전히 쑹 사장을 자신의 우상으로 꼽는다.

마이톈은 쑹커의 곡을 자산으로 출발한 회사다. 쑹 사장의 친구인 가오샤오쑹(高曉松)과 함께 작곡한 마이톈의 첫 작품 ‘후회 없는 청춘’은 연말 대상을 비롯한 전 가요제의 상을 휩쓸었다.

이 음반은 지금도 애호가들의 집중 수집 대상이다. 10년 넘게 꾸준한 판매 수익을 올리고 있는 효자 음반이기도 하다. 곧 이어 ‘마주 앉은 당신’ ‘위 침상에서 자는 형제’ 등은 중국 대학가에서 명곡 대접을 받는 곡들이다.

2000년 엔터테인먼트 산업계의 메이저인 워너브러더스가 마이톈에 합작을 제의해 왔다. 마이톈은 선뜻 여기에 응했다. 그러나 마이톈의 시선은 이미 음반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2003년 마침내 마이톈은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콜러링(Caller Ring)에 손을 댄 것이다. 워너 측이 반대하자 2004년 주저 없이 합작 계약을 파기했다.

인터넷서 돈 번 최초 음반사업가

쑹커의 ‘창조적 상상’들

■왜 전화벨은 반드시 ‘따르릉’이어야 하나?
그럼,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는 콜러링에 손을 대자!

■왜 인터넷이 돈이 안 된다고들 하나?
그럼,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통해 노래를 팔아 보자!

■왜 내가 돈 많은 보석상에 머물러야만 하나?
그럼, 타고난 재능 살려 엔터테인먼트 거인으로 크자!
워너와 결별한 마이톈은 지금의 타이허마이톈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1000만 위안을 투자해 국내 200여 곡에 대한 휴대전화, 인터넷 사용권을 구매했다. 곧 이어 이를 중국 내 휴대전화 부가서비스 제공업자에게 판매했다. 이들을 통해 중국 국영 이동통신에 콜러링 서비스를 제공했다.

당시는 다오랑(刀郞)이라는 걸출한 가수가 뜨던 시기였다. 다오랑의 감기는 듯한 음성이 전화기에서 울리자 콜러링은 곧 대박 상품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음반업자 사이에선 ‘전화 소리 한 번, 돈다발 콸콸’이란 유행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쑹커는 “당시 우리는 상상을 했다. 바로 창조적 상상”이라고 회고했다. 상상의 내용은 다양했다.

“왜 전화벨은 반드시 ‘따르릉’이어야 하나. 다른 소리를 들었으면….”

“아무데서나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전화기로 들을 수는 없을까.”

“연인끼리 전화할 때 그들만의 음악을 들으면서 사랑을 속삭이게 할 수는 없을까.”

“싫어하는 사람이 전화하면 그 사람에게 아주 불쾌한 음악을 들려주면 얼마나 유쾌할까.”

쑹 사장의 말은 이들의 상상력처럼 유쾌하게 이어졌다.

“우리의 상상력은 주변, 그리고 해외시장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해외 콜러링 사업을 견학한 우리는 우리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결국 이 유쾌한 상상, 창조적 상상은 투자금의 수십 배에 달하는 이윤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때부터 쑹 사장과 직원들은 틈만 나면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온갖 황당한 제안을 쏟아냈다. 혹은 깔깔대고 웃으면서, 혹은 데굴데굴 구르면서 이들의 사랑방 대화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저녁 시간을 훌쩍 넘겨 배를 움켜잡으며 주변 식당으로 뛰어간 일도 적지 않았다.

결국 쑹 사장과 직원들은 또 하나의 일을 저질렀다. 인터넷에서 노래를 팔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중국 최초의 시도다. 누구나 헐값으로 노래를 다량으로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다시 한번 대박을 기록했다. 그는 ‘인터넷에서 돈을 번 최초의 중국 음반사업가’라는 이름을 남겼다. 현재 타이허마이톈은 연간 매출액 8억 위안(약 1000억원)을 넘기는 매머드급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성장했다.

그의 성공 얘기를 듣다 보면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처럼 승승장구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그는 사실 어린 시절부터 독특했다. 한마디로 천재성과 광기가 돋보이는 아이였다.

그는 장난이 심했다. 이 때문에 거의 하루 걸러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다. 규율을 지키지 않는 아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쑹커의 종아리는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자존심 강하고, 폼 잡기 좋아하는 소년 쑹커는 틈만 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집단 싸움을 하기 일쑤였다. 정학 처분을 받은 것도 두 번이나 된다.

1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집안 내 유일한 남자가 됐다. 어머니와 누님 넷이 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천둥벌거숭이였다. 어머니가 한번은 “앞으로 대체 어찌하려고 이러느냐?”고 야단치며 쑹커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을 정도였다.

▶중국 록 페스티벌 공연장에 폭우가 쏟아졌지만, 청중들은 큰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

그러나 고3이 되면서 갑자기 모든 것이 달라졌다. 쑹커는 돌연 공부만 파고들었다. 객기 아래 파묻혔던 공부에 대한 천부적인 재질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의 성적은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치솟았다. 선생과 친구들은 물론 그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그는 보란 듯이 당시 최고 명문인 칭화대학에 합격했다. 그것도 당시 인기학과였던 환경학과였다. 모두들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대학 시절의 쑹커는 우상 그 자체였다. 그는 대학가요제의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다시피 했다. 기타 경연대회도 그의 독무대였다. 싸움도 일등이었고, 축구 실력도 교내 으뜸이었다. 그가 대학시절 작곡한 ‘한번 가니 그만’이란 노래는 모든 대학생이 교가 삼아 부를 정도였다. 열차 플랫폼에서 이 노래를 부르다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그는 어디를 가나 시선을 모았다. 여학생들은 그의 눈길 한번 받기 위해 안달했다. 쑹커가 캠퍼스에서 공연할 때는 괴성과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마치 세계적인 가수의 공연 같았다.

이때부터 후배 대학생 가수들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번 가니 그만’을 불렀다. 그리고 그를 우상으로 삼았다. 그에겐 ‘따꺼(큰형님)’, 혹은 ‘따쑹(송 형님)’이란 애칭이 따라다녔다.

사실 쑹커는 어릴 적부터 카리스마가 넘쳤다. 대범했으며, 의리를 강조했고, 정의를 중시했다. 친구는 넘쳤고, 어딜 가나 먹고 마셨다. 그는 “나는 나이 어린 친구, 그리고 나보다 낫게 보이는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했다. 그래야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전공과 다른 영역을 넘나들며 사람을 사귀었고, 학년에 관계없이 교우관계를 터갔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 각자의 영역에서 성공한 걸출한 인물들이다. 그가 지금도 젊은 감각, 변화에 대한 열망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폭넓은 교우관계 덕분이지 모른다.

마이톈의 다음 목표는 뭘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그들의 상상력이 튀어나가는 곳, 그곳이 아마도 마이톈의 다음 시장이 될 것이다.

쑹커 사장은…
베이징 대학가 주름잡은 싱어송라이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자는 누굴까. 여러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아마도 ‘하고 싶은 일을 즐기다가, 덤으로 돈까지 번’ 그런 부자가 아닐까.

말은 그렇지만 세상에 그런 부자는 쉽지 않다. 모두 돈 되는 것을 찾아 헤매다 ‘천신만고 끝’에 돈을 번 경우가 대부분이다. 천신만고 안엔 행복은커녕 고통만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쑹커 사장은 대단한 행운아다. 우선 그를 취재한 중국 기자들의 평가를 보자.

“학력을 논하자면 칭화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노래로 치자면 일찍이 베이징의 대학가를 두루 누빈 스타 싱어송라이터다. 사업을 얘기하자면 현재 중국 음반계를 쥐락펴락하는 풍운의 인물이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콜러링으로 1억 위안(약 130억원)을 움켜쥔 인물이고, 음악회사 사장으로는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돈을 번 인물이며,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일궈낸 인물이다. 그런데도 불혹의 나이를 넘어섰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여전히 민첩하고, 새로움에 감격하며,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몸을 던진다.”

중국 언론이 왜 쑹커에 열광하는 걸까. 답은 하나다. 그의 시들지 않은 열정과 창조적 도전정신 때문이다.
쑹커의 첫 사업은 엉뚱하게도 보석 장사였다.

칭화대 환경학과를 졸업한 쑹커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박사 학위를 염원한 어머니의 뜻을 따른 결정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는 전공은 팽개치고 엉뚱하게 보석 체인판매점을 시작한다.

“2년간의 보석 판매원 생활은 그야말로 보석 같았다. 형형색색의 인물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공과는 무관한 일이었지만 이 일을 통해 내가 앞으로 비즈니스맨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

그는 돈을 벌었다. 그 덕분에 그린카드(영주권)도 발급받았다. 그러다 훌쩍 귀국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미국 생활이 갑자기 따분해졌기 때문이다. 귀국 뒤에도 그는 여전히 보석상을 경영했다. 옌사(燕沙), 싸이터(賽特) 같은 대형 백화점에 모두 그의 보석상이 있었다. 그는 절로 남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되어 갔다.

그러던 1996년 어느 날 옛 친구인 가오샤오쑹(高曉松)이 찾아왔다. 그는 당시 가장 날리던 대학가의 작곡가였다. “야 이 사람아! 한때 대학가를 주름잡던 작곡가이자 가수였던 자네가 이 무슨 숨바꼭질인가? 그만 딴청부리고 나가세.”

당시 가오는 대학생들을 겨냥한 특별 음반을 준비 중이었다. 그는 쑹커의 자금과 재능이 모두 필요했다. 쑹커는 두말없이 털고 일어섰다. 휴화산 속에 묻혔던 과거의 열정이 활화산처럼 솟아올랐다. 그는 보석상을 친구에게 넘겼다. 그의 타이허마이톈은 금세 중국 엔터테인먼트계의 거인으로 우뚝 섰다.

그에게도 물론 위기는 있었다. 1999년의 일이다. 그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중국 음반시장의 침체가 원인이었다. 그는 “나는 철저히 퇴폐적으로 지냈다”고 그 시절을 돌이켰다. 하루 종일 방에 웅크리고 있다가 견딜 수 없이 배가 고파야 밖으로 나와 1위안짜리 만두나 국수를 먹었다.

“내가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랜 고통 끝에 명쾌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보석 판매 같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오선지 위에 재를 흩날리던 담배에 덴 상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오늘도 쑹커는 새로운 창조를 찾아 열심히 이곳저곳을 그의 직원들과 함께 기웃거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