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정주영 ‘불멸의 패기’
창업 세대 불굴의 도전 그들의 DNA는 ‘국가 경제 재건’… 피터 드러커도 “한국은 기업가 정신 충만” |
한국 경제의 성장사는 기업가 정신의 발현과 궤를 같이한다. 불굴의 도전정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패기가 없었다면 한국 경제가 60년대 최빈국에서 오늘날 같은 번영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특히 한국에는 걸출한 기업가 정신을 소유한 인물이 많았다. 타계한 경영학의 대가 피터 드러커가 한국을 두고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나라”라고 표현한 것은 그냥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정주영의 ‘無에서 有 창조’ 기업가 정신이 충만한 대표적인 사람은 생전에 피터 드러커도 만난 적이 있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기업가 정신으로 이룩된 기업이다. 지금 세계 조선사업을 쥐락펴락하고 있는 현대중공업의 모체인 현대조선소 설립도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이 없었더라면 탄생하지 못했다. 돈 한 푼 없던 정 명예회장은 1971년 9월 영국 버클레이 은행으로부터 차관을 얻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가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조선소 설립 경험도 없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상황에서 영국 은행의 대답은 한마디로 ‘No’였다. 그러나 정 회장은 간단히 물러서지 않았다. 갑자기 바지주머니에서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펴 보였다. “이 돈을 보시오. 이것이 거북선이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소.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그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소.” 그는 임기응변으로 롱바톰 회장을 감동시켜 차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제 문제는 선주를 찾는 일이었다. 그때 정주영의 손에는 황량한 바닷가에 소나무 몇 그루와 초가집 몇 채가 선 초라한 백사장을 찍은 사진이 전부였다. 정 회장은 이 같은 광경이 담긴 미포만 사진 한 장을 쥐고 미친 듯이 배를 팔러 다녔다. 결국 정주영은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t짜리 배 2척을 주문 받았고 조선소 건립과 동시에 2척의 배를 진수시킨 세계 조선사에 유일한 기록을 남겼다. 충만한 기업가 정신은 요즘 유행하는 ‘창조경영’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열정 없이는 아무것도 새롭게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서산 간척지를 만들 때 사용된 유명한 ‘유조선 공법’은 불굴의 기업가 정신이 ‘창조경영’으로 발현된 경우다. 80년대 초 서산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너무 커 20만t 이상의 돌을 구입해 매립해야만 물막이가 가능한 곳이었다. 이때 정 회장은 “간척지 최종 물막이 공사는 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공사며 설사 인력으로 한다 하더라도 그 엄청난 비용이 문제”라며 “밀물과 썰물 때의 빠른 물살을 막기 위해 폐유조선을 침하시켜 물줄기를 차단 내지 감속시킨 다음 일시에 토사를 대량 투하하면 물막이 공사를 완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유조선 공법에 대한 실행 여부를 현대의 기술진이 면밀하게 분석한 후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자 정 회장은 84년 2월 24일 직접 유조선에 올라 최종 물막이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나중에 ‘정주영 공법’이라고 불린 이 공사법은 공기도 9개월 단축시켰고 공사비를 280억원이나 절감했다. 수익만 생각하고, 안정만 생각하는 껍데기 기업가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거대한 모험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 고(故) 이병철 회장 역시 거대한 모험으로 오늘날 삼성그룹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한국을 세계적인 전자강국으로 만들었다. 이 회장이 반도체 산업에 본격 투자를 결정한 때는 1983년. 1970년대 삼성이 투자한 중화학공업은 거의 모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은 후였다. 이 때문에 그가 다시 대형 장치산업에 투자한다는 것은 자신은 물론 그룹의 존망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1983년, 전자제품의 수출 한계와 중공업 부문의 투자 한계를 절감한 73세의 이병철 회장은 혈혈단신 고심 끝에 반도체 산업에 집중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이 회장의 생각은 이랬다. ‘천연자원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은 한국이 경제성장을 지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술집약 산업을 육성하는 것이다. 철강 1t의 부가가치는 20만원이며 자동차 1t은 500만원이고, 컴퓨터 1t은 3억원이며, 반도체 1t은 13억원이다. 이제 전 세계는 반도체 전쟁에 돌입해 있다. 반도체 산업을 장악하는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 한국과 삼성의 미래는 하이테크산업에 달려 있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생산국으로 성장했다. 세계에 깃발 꽂은 김우중
또 1년의 3분의 1 이상을 해외에서 보내고 비행기를 침실 겸 사무실로 여기던 김 전 회장의 도전정신이 무명의 대우그룹을 20년 만에 세계 경영의 주역으로 만든 원천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이런 걸출한 기업가 정신 소유자들 덕에 한국은 지금까지 세계 12위 경제 대국의 지위를 차지하며 풍요를 누리고 있다. 만약 오늘처럼 외소해진 정신으로 소극적으로 임했다면 아직도 한국은 선진국의 하청공장으로, 산업보다는 수공업에 머물면서 생계를 연명하고 있을지 모른다. 불굴의 투지는 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은 국가적인 형편부터 창업을 하겠다고 나설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만큼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흔히 우리나라 경제 역사가 50년이다 60년이다 그러는데 식민시대 36년을 지내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나라에 공업이라 해 봤자 면방직이 한 5000축 있었을까 말까 하고요, 민족자본이라는 것은 양조장밖에 없었습니다. 그게 민족자본입니다. 그 다음에 유통구조의 화신백화점, 이런 정도가 우리나라의 민족자본이에요. 그 정도가 우리나라 경제였어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뭐가 있었습니까. 그러다가 미국에서 준 무상 원조물자, 그거 먹고 우리가 살았습니다. 그것이 우리나라 국가경제의 실태였어요. 그 다음에 가뜩이나 못사는데 6·25전쟁이 나서 전부 잿더미가 돼버렸잖아요. 정치적인 격변은 또 얼마나 심했습니까.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나타나서 어떡하든 살아야 되니까 경제발전을 해야 된다, 차관을 들여온다, 그렇게 하면서 사실 이승만 박사가 요구한 배상금의 10분의 1도 안 됩니다만 36년 동안 지배한 일본의 배상을 받아 그걸로 시작한 것이 사실상 우리나라 경제의 시작입니다. 그 이후에 이제 기라성 같은 삼성의 이병철씨나, 현대 정주영씨나, 조금 젊었지만 김우중씨나, 물론 그전에는 박흥식씨 같은 분들이 계셨지만 그런 분들이 주도적인 견인차 역할을 해가지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어쨌든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왔다는 건 기적입니다. 기적을 일궈낸 건 우리 기업인들하고 국민입니다. 기업가들은 기적의 정신을 잘 알고 매진하고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국민이 기적의 주인공이 국민 자신이라는 걸 모르고 있어요. 이게 기막힌 거예요. 국민이 투철한 사명감과 자존심을 가지고 경제를 키운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어떤 기업가가 나서도 우리 경제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국민의 에너지 없이 어떻게 경제발전이 있습니까.” 개척자들의 경제 재건 투혼
“우선 경제인들부터 힘을 결집시켜야 되겠다 싶어 한국 최초로 경제인 클럽을 만든 게 한국경제인협회 발족입니다. 그때부터 사실 경제 재건의 불이 붙은 거예요. 초대 회장에 이병철씨를 시켰는데, 이 양반이 일에 미쳤어요. 그때 1인당 국민소득이 78달러요. 6 4년에 수출 1억 달러를 했고 74년에 100억 달러를 했는데 좌우간 경제는 뛰어다니지 않으면 일어서지 않는다면서 이정림씨니 이한구씨니 그런 몇몇 기업인하고 같이 반은 미쳤다고 할 정도로 뛰었어요. 이 회장이 그렇게 뛰어다니니까 경제를 모르던 군인들이 보면 이상한 거지. 더구나 5·16 직후에 기업인들을 대부분 부정축재자로 구속했다가 석방시켰단 말이오. 이병철씨는 마침 일본에 있어서 구속은 면했지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이 설치니까 군인들은 전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겁니다. 나한테도 기업인들한테 속아서 돌아다닌다고 별의별 말들을 다하고 말이지. 하루는 이 회장이 나를 찾아요. 만나니까 한국에 뭐가 있느냐 그거야. 기술이 있느냐, 자본이 있느냐, 그렇다고 자원이 있느냐고. 그러더니 기업인들이 미주반, 구라파반으로 팀을 짜서 기술과 자본을 끌어올 테니까 외국에 내보내 달라는 겁니다. 그건 정말 기업인들이 나서지 않고는 해결할 길이 없는 얘기였어요. 그때는 운크라 원조나 받고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던 시절인데 정부가 뭘 안다고 나가겠어요. 그래가지고 자신 있느냐고 했더니 국가경제를 위해서 명을 걸기로 했다 그겁니다. 당장 박 의장에게 보고했지요.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최고회의 군인들이 펄쩍 뛰는 겁니다. 돈 가지고 ‘토끼려고(도망치려고) 수작 부린다’ 이거지요. 미칠 노릇이야. 그런데 박 의장이 들어보니 이 회장 얘기가 옳거든? 내보내라고 말이야. 그게 바로 대한민국에 자본과 기술을 유치해오는 최초가 되는 겁니다.” 사실 한국 경제의 여명기에는 돈 빌릴 은행조차 없는 상황에서 창업에 나선다는 것은 오로지 열정과 투혼으로 온갖 산고를 이겨내야만 하는 투쟁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이것저것 재고 할 틈이 없었다. 옥포조선소를 창업했던 남궁연 회장은 울산공업단지를 만들 때 일화를 소개했다. “산업을 일으키자면 공업센터가 있어야 되겠고, 그때는 개인적인 사심으로 뛰어다닌다는 건 손톱만큼도 생각을 하지 않을 때요. 할 수가 없어. 전부가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민족기업을 만들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애를 썼으니까. 그러면 왜 울산이냐. 일본인들이 애당초 울산에 큰 군수공장을 지으려고 했어요. 일본 열도가 폭격을 당하니까 한반도에 와서 군수공장을 지으려고 엄청난 조사를 한 거지요. 그 자료가 나한테 있었단 말이오. 그래서 우리가 거기에 공업센터를 세워야겠다, 이렇게 작심하고 모든 자료를 당시에 박정희 의장 측근으로 경제고문을 했던 김용태씨에게 줬어요. 그랬더니 박 의장의 동의를 받아낼 테니까 그럼 해보자 그렇게 된 건데, 그때가 1961년 12월 31일이야. 박 의장께서 연초 휴가를 취소하고 현장을 둘러보겠다 하시는데 어떡합니까. 만사를 제치고 내려가는 거지요. 그런데 12월 31일 그때 눈이 굉장히 많이 와서 쩔쩔매다가 천안에서 순사한테 잡혔어요. 왜? 권력형 부정축재 거두들이 밤중에 야반도주를 한다, 이래가지고 몽땅 경찰서로 끌려간 거야. 순사들은 상부에 보고하느라고 신이 났어. 부정축재 거두들을 체포했다 이거야. 그런데 조금 있으니까 경찰서장이 쫓아오고 체포한 순사한테 호통을 치더니 밤이 되고 늦었으니까 온양온천에서 주무시고 가라고 말이야, 방까지 잡아주고 잘해줘요. 팔자에 없는 온천을 그때 처음 했어요. 설도 못 쇠고 초하룻날 울산으로 갔지요. 도착하면서부터 정신없이 차트를 만드는 겁니다. 그랬더니 그 이튿날 박종규 소령이 아직 경호실 제도가 확립이 안 되었을 땐데 박 의장을 모시고 김용태씨하고 같이 내려왔어요. 근데 수심이 얼마고 공업용수는 얼마 얻을 수 있고 단지도 굉장히 넓어서 충분하다, 그러니 공업단지로는 최적지다, 열심히 차트를 가지고 브리핑을 했더니 이 어른이 반응이 없어요. 근데 좀 생각을 하시더니 ‘나라에 돈이 있어요, 기술이 있어요? 뭘로 가능하다고 허황된 얘기를 합니까?’ 이러시네. 그러니깐 김용태씨가 또 가관이야. ‘각하께서 만드시라는 거 아니잖습니까. 결심만 해주시면 만드는 건 기업인들이 하는 거지요.’ 하하하. 이래가지고 김정렴 상공차관이 팀장이 돼서 막 밀어붙인 겁니다. 그러니까 석 달 만에 울산공단 기공식을 하는 겁니다, 3월 16일에.” 창업 1세대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부의 창출은 부수적인 욕망이었고 그보다 앞서 어떤 산업이건 그들에게는 반드시 국민의 생활 향상과 국가경제를 생각하는 가치관이 있었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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