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부(權府)에 붙으면 낙하산을 탈 수 있다. YS정부 땐 민주산악회가 주도한 ‘등산화 군단’이, DJ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엔 ‘동교동계’와 ‘386 세력’이 황금 낙하산을 등에 멨다. 낙하산을 이용, 정부기관 곳곳에 하강한 이들은 권력의 ‘노른자위’를 손쉽게 점령했다. 역대 정권들의 ‘낙하산 인사’ 실태를 살펴봤다.
‘등산화’의 전성시대 YS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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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산악회는 YS의 핵심 사조직이었다. YS 낙하산 인사들은 대부분 민주산악회 소속이었다. | |
YS(김영삼 전 대통령)는 대통령 취임 초기, 버릇처럼 내뱉는 말이 있었다. “인사가 만사(萬事)입니다.” 엄정한 인사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군사정권의 병폐 ‘낙하산 인사 관행’을 뿌리 뽑겠다는 각오였다.
그러나 YS의 굳은 의지는 한낱 공염불에 그쳤다. 낙하산의 질긴 ‘끈’에 스스로 볼모가 된 것이다. 문민정부 시절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 조사 결과(97년)에 따르면 YS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49개 정부 산하기관 98개 직위 중 95개를 ‘낙하산 인사’로 채웠다.
그 가운데 27명은 민주계(김영삼계)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만하면 ‘낙하산 인사’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YS 시절 낙하산 인사의 핵심 코드는 ‘민주산악회(민산)’다. YS의 최측근 중 한 명인 서석재 전 의원이 이끌던 ‘나라사랑본부’ 인사들도 정부기관에 속속 투하됐지만 민주산악회보다는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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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산은 YS가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80년대 초 결성된 등산 조직을 말한다. 김동영, 최형우, 김덕룡 등 YS의 가신 그룹이 모두 참여했다. YS와 민산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다. 13, 14대 대선 당시 YS의 대선 캠프는 다름 아닌 민산이었다. 청와대를 접수한 YS에게 민산 조직원들은 모두 ‘개국공신’이었던 셈이다.
정치원로 A씨는 “민산 조직원들은 YS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며 “이 때문에 YS는 민산 조직원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챙겨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YS가 민산 해체 지시를 내리기 전 민산 핵심 조직원들의 갈 자리를 미리 점찍어 놨다는 뒷말이 무성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실제 민산 해체 후 핵심 조직원들은 정부 산하기관에 줄줄이 배치되기 시작했다. ‘군화’가 지배하던 정부 산하기관을 ‘등산화 군단’이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민산 부회장 출신 김우석 전 의원이 토지개발공사 사장으로 임명된 것을 비롯, 대부분 정부기관의 ‘노른자위’를 민산 인사가 차지했다.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에 오른 조종익 전 의원은 민주산악회 부회장 출신이고, 농어촌진흥공사 사장직을 꿰찬 조홍래 전 의원도 민산 부회장을 역임했다. 90~91년 민산 대구경북도지부 지부장을 지낸 이재옥 전 의원 또한 석유개발공사 이사장에 임명됐다.
노조가 없어 낙하산 인사를 배치하기 손쉬웠던 한국마사회는 아예 민산이 점령하다시피 했다. 마사회 회장(오경의·민산 회장), 부회장(김용각·민산 간부), 업무이사(노병구·민산 연구원장), 상임감사(박홍섭·민산 간부) 등 요직을 꿰찼던 것.
물론 모두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광업진흥공사 사장 조종익 전 의원, 농어촌진흥공사 사장 조홍래 전 의원은 문민개혁을 시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산 인사가 능력에 맞지 않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가령 안동시정 자문위원, 덕용해운 대표를 역임한 오경의 회장은 마사회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고려대 전임강사, 도서출판 소명 대표를 지낸 이재옥 전 의원 또한 석유개발공사 이사장을 맡기엔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들었다.
전국공공노동조합연맹 이재기 정책총괄실장은 “능력 없는 사람 또는 조직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 조직 대표로 오면 아랫사람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며 “조직성과가 떨어질 우려도 그만큼 커진다”고 말했다. 그는 “이 때문에 무분별한 낙하산 인사는 지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DJ의 가신 그룹과 아태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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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교동계의 좌장 격인 권노갑 전 최고위원은 낙하산 인사를 직접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주인공이다. | |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온정의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설사 자신을 배신해도 철퇴 한번 제대로 내리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DJ의 ‘온정 리더십’은 인사정책에서 치명적 약점을 드러냈다. 적임자를 선택할 때 ‘능력’보다는 ‘온정’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사업 현장에서 성공한 사람을 국영기업체의 장으로 영입해야 한다”는 DJ의 호언장담과 달리, 정부 출범 초기부터 ‘낙하산 인사’ ‘정실인사’ 논란이 끊이지 않은 것도 이런 이유다.
실제 DJ정부 초에 수많은 정치인이 낙하산을 타고 산하기관으로 내려갔다. 이 때문에 98년 8월엔 새정치국민회의 전·현직 당직자 21명이 “우리도 정부산하단체에 보내 달라”며 떼를 쓰는 사건도 발생했다.
2000년 무렵엔 낙하산 인사가 아예 활개를 치기 시작했는데, 산하기관에 둥지를 튼 인사만 해도 박문수 전 새정치국민회의 지구당 위원장(광업진흥공사), 조만진 전 새정치국민회의 지구당 위원장(보훈복지공단), 서생현 전 국민회의보훈특별위원장(마사회)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DJ식 낙하산 인사의 중심엔 동교동계가 있었다. DJ의 가신 그룹 동교동계는 주요 공직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권한이 막강했다.
그 가운데서도 유독 권력이 집중된 인사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권노갑 전 최고위원이었다. 동교동계 맏형 격인 권 전 최고위원은 명실상부한 DJ의 복심이자 그림자. DJ에 대한 충성도 또한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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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권 전 최고위원의 충성도를 엿볼 수 있는 일화 한 토막이다. 97년 대선 직전, 권 전 최고위원이 한보 사태로 구속 수감됐을 때다. 그는 당시 이런 말을 남기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감옥에서 죽어도 좋으니 총재(DJ)가 당선됐으면 좋겠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아도 DJ가 낙선하는 것은 두렵다는 의미다.
권 전 최고위원은 곧잘 DJ의 악역을 담당했다. DJ 스스로 꺼리는 일도 스스럼없이 맡았다. 2000년 4·13 총선(16대) 때의 일이다. 권 전 최고위원은 낙천대상자를 선정하는 역을 맡았다. 그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낙천자에게 다른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도 그의 임무였던 것이다.
16대 총선 낙천자들의 모임인 ‘일오회(一梧會)’ 멤버들이 대거 정부기관 고위직에 취직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앞장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16대 총선에서 낙천돼 일오회를 결성했던 조홍규 전 한국관광공사 사장, 양성철 전 주미대사, 채영석 전 고속철도공단 이사장 등이 그들이다.
다른 통로도 있었다. 아태재단이다. DJ정부의 핵심 ‘인재풀’로 불린 아태재단은 정부기관 진출의 지름길이었다. 아태재단 소속 인사 가운데 정부 고위관료로 임명된 사례는 많다.
DJ정부에서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과 국가정보원장, 통일부 장관을 차례로 역임한 임동원 전 대통령외교안보통일특보는 아태재단 사무총장 출신이다.
신건 전 국가정보원장도 아태재단 서울시지부장을 지냈다. 정부 초기 국가정보원 1차장으로 발탁됐던 나종일 전 국가안보보좌관과 김상우 전 국제안보대사는 연구위원 출신이다.
아태재단 소속 인사들이 정부 산하기관 임원으로 기용된 예도 적지 않다. 황용배 전 한국마사회 감사는 아태재단 후원회 사무처장을 지냈고, 오기평 전 세종재단 이사장도 아태재단과 관련이 깊었다. 아태재단 기획실장 출신인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중앙위원을 지낸 정복진 전 성업공사 이사도 마찬가지.
이 밖에 종합유선방송위원장을 지낸 한정일씨,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역임한 한상진 교수 또한 아태재단과 직·간접으로 연결돼 있다. 이처럼 DJ정부 인사의 중심은 동교동계와 권 전 최고위원 그리고 아태재단이다.
‘보은’과 ‘코드’가 판친 참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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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총선 또느 지방선거에 출마했다 고배를 마신 낙선자들을 공공기관 임원에 임명했다. 사진은 2002년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했던 한이헌 기술보증기금 이사장(왼쪽). | |
이헌만 전 경찰청 차장이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에 임명됐던 지난해 초의 일이다. 낙하산 인사 파문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도 너무 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수십 년 경찰 ‘녹’만 먹은 사람이 어떻게 가스안전공사의 수장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경찰 분야에선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가스안전에는 ‘문외한’이라는 주장이다. 더 큰 문제는 이 전 차장이 ‘보은(報恩)’ 차원의 낙하산 인사였다는 점이다. 그는 17대 총선에서 부산 사하갑에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낙선에 대한 보상으로 가스안전공사 사장직을 꿰찬 셈이다.
이 전 차장 사례는 노무현 식 낙하산 인사의 전형을 보여준다. 노무현 대통령은 ‘보은’의 의미로 ‘낙하산’을 건넸다.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인사를 공직에 임명, 빚을 갚았다는 얘기다.
이철 전 코레일 사장은 부산 북강서갑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해성 전 한국조폐공사 사장도 부산 중동에서 낙선했고, 노재철 사립학교교직원연금관리공단 감사 또한 부산 동래을에서 떨어진 뒤 공공기관에 입성했다.
박재호(부산 남을) 전 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 허진호(부산 수영)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 김용문(밀양 창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원장, 이정환(울산 중구)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원장 등도 마찬가지다.
공천에서 탈락한 낙천자도 ‘낙하산 선물’을 받았다. 이우재(공천 탈락) 한국마사회 회장, 박양수(공천 탈락) 전 대한광업진흥공사 사장이 그렇다. 총선뿐 아니다. 지방선거도 마찬가지였다.
서범석 사립학교교직원연금관리공단 이사장, 이재용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은 각각 전남도지사, 대구시장에 도전했다 고배를 마신 인물들. 한이헌 기술보증기금 이사장도 2002년 부산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후 공직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한나라당 낙하산인사조사특별위원회가 2006년 10월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출범 후 100여 개 정부 산하기관에 142명의 정치권 인사를 내려보냈다. 2008년 1월 현재 기획예산처에서 관리감독하는 298개 공공기관 상임임원 792명을 분석한 결과 역시 비슷한 양상이다.
무려 140여 명이 친노 및 열린우리당 출신, 노무현 정부 시절 장·차관이나 청와대에서 일한 바 있는 ‘낙하산 인사’였다. 공공기관 자리가 권력 주변의 ‘식객(食客)’이나 낙선·낙천자의 ‘노후 보장’으로 전락한 셈이다.
인사정책은 ‘측근’을 버려야 성공할 수 있다. 코드인사와 단절해야 엄정하게 추진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버림과 단절에 서툴렀던 YS, DJ,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낙하산 인사’를 되풀이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청와대를 나왔다. 이명박 정부에선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