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정부 ‘낙하산의 추억’ 지워라
공공기관장 자리 300여 개 물갈이 태풍 … 정권이 ‘전리품’으로 여겨선 안 돼 |
#장면1 = 총선 이튿날인 4월 10일 보건복지부는 오성근 국민연금기금운용 이사의 사표를 수리했다. 오 이사는 기관장이 아니다. 220조원의 국민연금기금 운용을 맡는 실무 책임자다. 그럼에도 김호식 국민연금공단 이사장과 함께 사표를 냈다가 옷을 벗었다. 이튿날 복지부 산하 국민연금기금운영위원회는 ‘금융채무 불이행자에 대한 채무상환금 대여계획안’을 심의 의결했다. 이는 신용불량자가 낸 국민연금 중 최고 절반까지 대출해줘 빚을 갚도록 하겠다고 청와대가 3월 25일 발표한 ‘뉴스타트 2008 프로젝트’를 사후 추인한 것이다. 이 제도는 소외계층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지만, 국민연금이 언제라도 빼내 쓸 수 있는 저축처럼 인식돼 노후 생계 보장이라는 본래 목적을 훼손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장면2 = 공기업 사장에 대한 일괄 사퇴 압력에 대해 공기업 임원 후보 추천권을 가진 공공기관운영위원회 위원들 간에 의견이 엇갈렸다. 일부 민간위원들이 정부의 사퇴 압력은 낙하산 인사를 방지하기 위한 입법 취지에 위배되며, 공공기관의 역할과 내용이 변하지 않았는데 정권이 바뀌었다고 사표를 내라는 것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운영위원 18명 중 6명의 민간위원들이 공식 회의 석상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할 것으로 알려지자 정부는 4월 22일로 예정된 운영위원회를 연기했다. #장면3 = 외교통상부는 4월 14일 27명의 대사와 10명의 총영사에 대한 인사를 했다. 그런데 미국 시민권자와 대통령 당선에 기여한 인물을 총영사로 기용했다는 ‘보은 인사’ 논란이 일었다. 사흘 만인 17일 주 애틀랜타 총영사에 내정된 이웅길 전 미주한인회총연합회 수석부회장이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누가 되지 않겠다”며 자진 사퇴했다. 그는 이명박 캠프 선대위 비서실에서 해외 분야를 맡았는데 미국 국적이다. 총선이 끝나자 임기와 관계없이 공공기관장들이 앞다퉈 사표를 낸 채 새 정부 신임 여부를 기다리고 있다. 그중 일부는 사표가 수리돼 후임 사장 공모 절차에 들어갔다. 바야흐로 이명박 정부의 공공기관장 물갈이 인사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과연 실용정부의 공공기관장 인사는 구태를 벗을 수 있을까? 벌써부터 4·14 해외공관장 인사가 ‘MB식 낙하산 인사’의 신호탄이 아니냐는 비관론과 이번에야말로 공기업 인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기대론이 교차하고 있다.
총선 끝나자 본격 물갈이 정치권은 공기업 자리를 정권 창출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공기업 사장과 감사 자리에 정치권 인사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는 행태는 어느 새 5년 주기 행사가 됐다. 정권과 정부가 바뀔 때마다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여당은 대놓고 가급적 많은 당내 인사를 공기업 경영진으로 진출시키고 싶어 한다. 그 결과 규모가 크고 예산도 많은 힘 있는 자리는 정권 실세와 가깝거나 코드가 맞는 인사들로 채워지곤 했다. 지난해 5월 브라질 이과수 폭포 관광으로 물의를 일으킨 공기업 감사들의 행태는 낙하산 인사의 폐단을 실감케 한다. 당시 감사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도(道) 조직 특보, 도 추대위 고문, 지역선대 위원장, 도 여성위원장 등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정치권 인사가 많았다. 이명박 정부도 출범한 지 보름 만에 공기업 인적 청산을 들고 나왔다. 3월 11일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포문을 열자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이 거들었다. 그러나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여론의 역풍을 맞을 것 같자 빼든 칼을 집어넣는 듯하다 선거가 끝나자 다시 본격 거론하고 나섰다. 교체 및 재신임 기준을 만들고 있는 정부는 능력 있고 필요한 인물을 기용하겠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4·9 총선에서의 낙천자를 낙선자와 같이 취급하지 않겠다고 한다. 총선에서 떨어진 경우는 몰라도 공천 탈락자는 고려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낙하산 인사의 재등장 가능성이 커졌다. 또 지금까지 나타난 기관장 사퇴 과정을 보면 근본적인 시스템 개선 없이 과거 청와대가 주도했던 인사 행태를 답습하는 모습이다. 그나마 금융공기업에 관료 출신을 배제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의미 있는 진전이다. 이는 모피아(MOFIA=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금융감독위원회로 이어진 관료 출신들이 낙하산 인사를 통해 금융기관장 자리를 장악하면서 금융권력화한 것을 꼬집는 말)의 폐해를 지적한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참에 금융공기업이 퇴직 경제관료들의 재취업 마당으로 활용되는 고리는 확실히 차단해야 한다. 그러나 기관장 교체 인사가 공공기관운영법을 정면으로 거슬러 법치주의를 훼손하지 않도록 하려면 공기업 경영평가와 감사원 감사 결과 등 객관적인 자료와 엄격한 인사 기준, 투명한 절차에 따라 옥석을 가려야 한다. 정치권에 줄을 댄 낙하산 인사나 코드 인사, 경영실적이 나쁘고 비리가 드러난 인사들은 이번에 물러나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이념과 관련이 없거나 전문성을 바탕으로 경영능력을 발휘하는 기관장은 계속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전 정권에서 임명됐다는 이유만으로 경영실적과 기관 운영에 문제가 없는 인사들을 쫓아내면 ‘제2의 코드 인사’에 다름 아니다. 공기업은 민간이 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정부 주도로 대민 서비스를 확대하는 데 그 존재 의미가 있다. 공기업이 경영을 잘해야 공공 서비스가 좋아지고, 가뜩이나 불안한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 같은 경영성과를 낼 수 있느냐 여부는 민간기업 이상의 전문성을 갖춘 유능한 경영자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동안 엉뚱한 사람을 앉히는 바람에 방만경영과 비효율을 낳았고 신이 내린 직장이란 비아냥을 듣는 것이다. 현행 기관장 공모제에 대한 수술도 필요하다. 참여정부는 낙하산 인사를 막고 선발의 투명성을 높인다며 공기업 최고경영자(CEO) 공모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실제 운영은 청와대나 정부가 내정한 인사를 잡음 없이 앉히는 거수기 역할이었다. 대외적으론 공모 형태지만 속내는 미리 낙점해 놓고 다른 사람을 들러리로 세우는 경우도 많았다. 후보추천위 구성 과정이나 위원 명단, 심사기준, 회의록 등 공모 과정이 공개되지 않은 채 밀실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추천위원회가 독립성을 갖도록 외부 전문가로 구성하고 실질적인 선발권을 주어야 한다. 또 해당 공기업 수장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과 이에 맞는 인물을 뽑기 위한 평가기준을 분명히 정해 밝혀야 한다. 제도만 그럴듯하게 갖춘 채 계속 낙하산 인사를 내려보내면 공기업 개혁은 물 건너간다. 이명박 후보의 선거공약 가운데 국민의 큰 지지를 받은 것이 공기업 민영화다. 공공기관에 대해 기능 중복, 민간과의 경쟁 여부에 따라 민영화나 통폐합의 절차를 밟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기대했던 공기업 민영화 계획은 뒤로한 채 새 정부는 사람부터 바꾸겠다고 나섰다. 공기업 직원들의 관심이 온통 기관장 교체설에 쏠리면서 경영 공백이 나타날 수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공기업은 대개 2~6명의 상임이사와 6~9명의 비상임이사를 두고 있는데, 새 경영진 인선→이·취임식→새로운 경영지표 제시 등 과정을 감안하면 상반기는 인사로 흘러갈까 걱정이다. 과감한 민영화·통폐합 앞당겨야 공기업 개혁은 정권에 힘이 있는 출범 초기에 하는 게 맞다. 과거 정부도 한결같이 공기업 개혁을 외쳤지만 시간이 갈수록 힘을 잃어 손을 놓는 바람에 부실을 더 키웠다. 그렇다고 공기업 민영화를 포함한 경영 합리화가 중요하지 기관장 물갈이가 능사는 아니다. 새 정부는 사람 바꾸자고 목청을 높이기 이전에 공기업 민영화와 경영 효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부터 제대로 짜야 옳다. 특히 민영화 계획의 경우 공기업이 반드시 담당해야 할 부문만 먼저 골라 놓고 나머지는 모두 민영화한다는 포지티브 전략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공기업 개혁이 인사보다 후순위로 밀리다 보면 공기업 개혁의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낮아진다. 공기업 수장에 오른 인사들이 새 정부 실세와의 교감을 들이밀며 해당 기관의 존립과 이익 보호를 위해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공기업 수장 교체를 먼저 해야겠다면 적어도 민영화와 구조조정에 대비하는 인사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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