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경제기사모음

천황家에 납품하는 어용상인

도일 남건욱 2008. 6. 29. 10:58
천황家에 납품하는 어용상인
젓가락 250년 이치하라
1764년 창업해 8대째 이어져 … 판매하는 상품은 무려 400종
일본 교토의 천년商人 ⑤

▶천황이 쓰는 양구 젓가락.

교토의 부엌인 니시키 시장 근처에 이치하라 젓가락 가게가 있다. 일본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젓가락 가게이고, 천황가에 젓가락을 납품하는 가게다. 창업은 1764년.

창업주인 헤이뵤에(平兵衛)는 오미(近江) 상인 출신이었다. 오미는 오늘날 시가현, 즉 교토 인근에 있는 작은 도시다. 헤이뵤에는 교토에 올라와 젓가락 가게를 시작했는데, 그의 말년에 실력을 인정받아 천황가에 젓가락을 납품하는 어용상인으로 지정된다. 천황가에 물건을 납품하는 어용상인은 수많은 업자 중 가장 최상의 물건을 납품하는 상인만이 지정된다.

헤이뵤에는 어용상인으로 지정된 후 천황가로부터 이치하라(市原)라는 성(姓)을 하사 받았다. 헤이뵤에는 자신의 이름 앞에 이치하라를 붙여 이치하라 헤이뵤에로 상호를 바꾸고 이때부터 이치하라 헤이뵤에(市原平兵衛)가 이 상점의 정식 상호가 된다.

천황이 쓰는 양구 젓가락은 1개에 840엔

이치하라 젓가락 가게에서는 무려 400종이나 되는 젓가락을 팔고 있었는데 그 용도가 모두 다르다. 기본적으로 일본의 젓가락은 우선 4종류로 나뉜다.

젓가락의 몸통이 둥근 마루(丸)형, 몸통이 네모난 사각형, 그리고 양구(兩口)형과 편구(片口)형이 그것이다. 양구는 젓가락의 양쪽을 다 쓸 수 있는 것을 말하고, 편구는 우리도 일반적으로 쓰는 한쪽만 쓰는 젓가락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양구 젓가락, 즉 양쪽이 모두 뾰족한 젓가락은 잘 사용되지 않는다. 이 젓가락은 일반인의 경우 정월이나 장례, 제사 등에만 사용한다.

정월에는 일본의 설날이 있으므로 양구 젓가락을 사용한다. 한쪽으로는 자신이 음식을 먹고, 다른 한쪽으로는 신이 먹는다는 의미가 있다. 이때 사용되는 젓가락은 버드나무로 만든다. 버드나무는 속살이 희기 때문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고 청정한 기운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치하라’의 특징

□ 천황이 사용하는 젓가락
□ 쓰지 않는 물건은 판매하지 않는다
□ 대대로 창작 젓가락을 하나 이상 만든다
□ 불합격된 물건은 모두 반품처리
□ 고객 입맛에 맞춘 맞춤제작
이 양구 젓가락을 1년 365일 사용하는 단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일본 천황이다. 천황은 늘 신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세 끼를 바로 이 양구 젓가락으로 신과 함께 식사한다. 천황이 사용하는 양구 젓가락은 버드나무가 아닌 층층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이 젓가락을 한 번만 사용하고 버린다. 즉 끼니마다 젓가락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독살 등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천황의 경우 소모품은 한 번만 쓰고 버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치하라 젓가락 가게에서도 천황이 사용하는 양구 젓가락을 팔고 있었는데 그 가격은 생각보다 싼 개당 840엔이었다. 여타의 젓가락이 개당 2000~3000엔, 비싼 것은 1만 엔이 넘는 것을 보면 천황이라고 해서 비싼 젓가락을 매번 사용하지 않는다.

효명 천황의 아들인 메이지 천황 때 일본의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기면서 잠시 천황가에 납품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이후 쇼와 천황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자신의 조상이 쓰던 이치하라 젓가락을 식사 때 준비하라고 지시하면서 천황가의 젓가락을 다시 납품하게 된다. 이후 이치하라 젓가락은 도쿄 간다(神田)에 있는 저승(著勝)본점, 효고현의 호전(戶田)죽예점과 더불어 어용상점으로 지정됐다.

오늘날 이치하라 젓가락 가게에서는 약 400종의 젓가락을 팔고 있다. 이 젓가락 가게의 가훈은 ‘쓰지 않는 물건은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400종 모두 쓸모가 다 다르다. 한·중·일 3국 중에서 젓가락 문화가 가장 발달한 일본답게 젓가락은 그 용도와 모양에 따라 다시 수십 종으로 나뉜다.

음식물을 찢을 때, 두 사람 이상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나눔 젓가락일 때, 채소를 먹을 때, 밥을 먹을 때, 생선회를 먹을 때, 튀김을 먹을 때, 콩자반이나 작은 깨와 같은 물건을 집어 올릴 때, 된장국을 먹을 때 다르고 그 길이나 젓가락 끝의 모양에 따라 또 이름이 다르다.

여기에 젓가락을 나무로 만들었는가, 아니면 옻칠을 했는가에 따라 다르다. 나무에 칠을 입힌 칠기 젓가락은 1700년대 이후부터 생산됐다. 그 이전 일본에는 칠기 젓가락이 없었다.

칠기 젓가락은 그 디자인이나 모양새가 수려해 귀빈접대 등에 쓰기 위해 만든 것이긴 하지만 젓가락 자체의 강도를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젓가락으로 면발이 굵은 국수 등을 먹을 때 칠기 젓가락을 사용하면 쉽게 휘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과자를 먹을 때 쓰는 젓가락은 장식이 많이 가미되어 있다. 이른바 흑문자(黑文字)라는 젓가락은 과자를 먹을 때 쓰는 젓가락을 말한다. 과자를 먹을 때 쓰는 젓가락은 칠기에 은박·금박 등 다채로운 무늬가 많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일본에서는 젓가락에 고객의 이름을 새겨 넣은 것도 있다. 귀빈을 초대했을 때 그 젓가락에 고객의 이름을 새겨 넣음으로써 손님을 한껏 기쁘게 하는 것이다.

세대마다 젓가락 한 종류 이상 창작

▶위 이치하라 사장(왼쪽)과 작가.
아래 이치하라에서 파는 젓가락.

요즘 이치하라 젓가락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상품은 ‘미야코바시’ ‘헤이안바시’ 두 종류다. 이치하라 젓가락은 지금까지 8대를 이어오면서 각자 자신의 세대에서 한 가지 특징 있는 젓가락을 개발해 왔다.

그 중 하나가 미야코바시라는 대나무 젓가락이다. 이 젓가락은 150년 이상 된 가옥의 천장에서 뜯어낸 대나무로 만든 것이다.

일본은 과거 집 안에서 취사를 했다. 장작불로 밥을 지으면 연기가 난다. 그 연기는 천장으로 올라가 초가지붕을 받치고 있는 대나무를 그을리게 한다. 수십 년간 장작 연기에 그을린 대나무는 나무 자체가 질길 뿐 아니라 연기 때문에 나무가 썩지 않는다.

이치하라 젓가락은 그중에서 150년 이상 된 대나무를 전국 방방곡곡에서 구해 젓가락을 만들어 팔고 있다. 이 젓가락은 일반 대나무 젓가락과 달리 그 내구연한이 무려 15년이나 된다. 일반 죽제품 젓가락이 1년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것에 비해 훨씬 오래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일본 농촌도 모두 개량돼 150년 이상 된 연기에 그을린 대나무를 구할 수 없어 이 제품은 곧 대가 끊길 것이라 한다. 미야코바시의 경우는 지금 사장의 아버지인 7대 사장이 개발해낸 젓가락이다. 젓가락 한 세트의 가격은 2800엔부터 5250엔까지 다양하다.

또 헤이안바시는 8대 사장 즉, 현재 이치하라 다카(市原高·55) 사장이 개발한 젓가락이다. 헤이안바시는 참깨 한 알도 집어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끝이 섬세한 것이 특징이다. 헤이안바시는 세트당 보통 3000엔대다.

헤이안바시나 미야코바시의 특징은 쓰기 편리하도록 만든 일반용이다. 즉 가정집에서 주로 쓰는 젓가락으로 반찬이나 밥 등을 모두 먹기 쉽도록 만든 다용도다. 젓가락을 직접 써보니 일단 손가락 사이에 착 달라붙어 착용감이 좋고, 무게감이 느껴져 젓가락이 헛돌지 않는 특징을 가졌다.

이치하라 다카에게 팔고 있는 400종의 젓가락 중 어느 게 가장 마음에 드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모든 젓가락이 사랑스럽다”고 대답했다.

이치하라 젓가락 가게는 자신들이 젓가락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교토에서 80㎞ 떨어진 오바마 지역에서 젓가락 장인들이 만든 제품을 납품 받아 오직 판매만 하고 있다. 장인들에게 젓가락의 디자인이나 나무의 재질, 칠기 디자인을 주문한다.

유행에 따라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또 일반가정용, 요정용, 식당용 등 업소에 따라 젓가락의 용도가 모두 다르므로 그 업소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해서 납품 받은 젓가락을 이치하라 가게에서는 표면이나 디자인, 칠기의 상태, 완성도 등을 점검해 합격된 물건만 판매하고 불합격된 물건은 모두 반품한다. 그런 까닭에 이치하라 젓가락은 최상의 물건만을 판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이치하라 젓가락은 일본에서 생산되는 모든 젓가락 종류를 구비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전통적인 젓가락을 사용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과거 일본이 공업화, 근대화하면서 일회용 젓가락이 유행하기도 했으나 근래에는 품질 좋고 안전한 전통방식으로 생산되는 젓가락을 찾는 고객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매년 8월 4일을 ‘젓가락의 날’로 정해 놓고 있다. 젓가락 문화의 전통을 후세에 이어주기 위해서다.
홍하상·논픽션 작가 (hasangstory@hanmail.net [937호] 2008.05.13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