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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무대로 390조 굴리는 ‘극성’

도일 남건욱 2008. 6. 17. 07:48
세계 무대로 390조 굴리는 ‘극성’
일본 ‘와타나베 부인’의 치맛바람
남편 쥐꼬리 월급에 ‘엔 캐리 트레이드’ 나서는 평범한 이웃 주부들

▶일본 아줌마들의 ‘욘사마’ 열풍은 스타에 열광하는 우리나라 10대 소녀들을 연상시킨다. 다른 점은 일본 아줌마는 소비력이 높다는 것이다.


지난 5월 30일 오후 일본 오사카(大阪)의 간사이(關西) 국제공항. 드라마 ‘태왕사신기’ 홍보행사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배용준이 출국장으로 나서자 팬 6000여 명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공항 입국장을 가득 메운 이들은 “오사카에 와서 고맙습니다” “배용준씨 ‘태왕사신기’ 대성공 축하해요” “당신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틀 전부터 이곳에서 기다렸습니다” 등의 문구가 적힌 한글 환영 플래카드를 들어 보였다. 감격해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일부 팬은 배용준을 조금 더 가까운 자리에서 보기 위해 이틀 전부터 공항 입국장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드라마 ‘겨울연가’로 시작된 욘사마(배용준) 열풍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좋아하는 스타를 보기 위해 며칠째 공항에서 노숙까지 했다는 이들은 10~20대 젊은 여성 팬이 아니다. 욘사마 열풍을 주도하는 것은 일본 아줌마들이다. 어릴 적 스타를 따라다니는 팬클럽 활동 경험이 있는 일본 아줌마 세대는 40대를 지나 경제력을 갖추면서 과감한 문화 소비계층으로 자리 잡게 됐다.

핵심 소비계층인 주부들이 열풍을 주도하다 보니 그 힘은 곧바로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됐다. 이렇게 해서 나온 말이 ‘욘겔계수’다. 총 생활비에서 욘사마 관련 상품구입에 드는 비용을 말한다.

관련 상품은 배용준이 드라마에서 쓴 머플러와 안경에서부터 사진집, DVD, 춘천 남이섬과 태왕사신기 촬영지인 제주도 등 촬영지 관광에 소요되는 비용 모두를 포함한다. 일본의 한 민간경제연구소는 이로 인한 경제효과가 한국과 일본을 합쳐 2조3000억원에 이른다는 보고서도 내놓았다.

일본 아줌마들의 힘은 이제 열도에 국한되지 않는다. 도요타, 소니 같은 국제적인 기업은 물론 국제 환율시장까지 좌지우지하는 큰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파이낸셜 타임스(FT) 등 외신들은 얼마 전부터 일본 주부 투자자들을 주목하고 있다. 10년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직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남편은 일주일 내내 일에 치여 허덕인다. 남편의 쥐꼬리만 한 월급, 연금으로 미래에 대비하려면 은행 이자라도 받아야 하지만 일본은 오랜 세월 제로금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금을 아무리 은행에 오래 맡겨도 이자를 기대할 수 없고, 오히려 은행까지 가는 교통비가 더 드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주부들이 착안한 것이 인터넷을 이용한 환율거래다. 일본에서 낮은 금리로 엔화를 빌려 외화로 환전한 뒤 해외의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면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첫 투자대상은 뉴질랜드 채권과 정기예금 상품이었다. 연 기준금리가 8%인 뉴질랜드나 연 6.25%인 호주에 투자했다. 뉴질랜드 달러화 값은 단번에 22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이렇게 거래되는 엔화를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 투자자는 ‘와타나베 부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와타나베’는 우리로 치면 가장 흔한 성씨인 김씨나 이씨에 해당한다.

옆집 아줌마가, 뒷집 이웃이 하루아침에 투자금의 20~30배의 이득을 챙겼다는 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린다면 어떨까. 외환투자 관련 세미나가 열리는 곳에는 어김없이 스웨터 차림의 아줌마 부대와 퇴직자 등 노인들이 몰려들었다. 전문 학원 강좌까지 생겨났다.

우리나라 복부인들이 국내도 모자라 미국과 중국의 땅값을 들쑤시고 있는 것처럼 와타나베 부인은 초저금리 엔화를 무기로 국제 외환시장의 큰손으로 성장했다. 인터넷 시대에 등장한 일본의 새로운 얼굴이다.

낮에는 육아와 집안일을 해야 하는 주부들에게 외환투자는 안성맞춤의 재테크다. 낮 시간에는 집안일에 집중하고 런던 외환시장이 열리는 오후 5시부터 조금씩 환율 추이를 살펴본다.

뉴욕시장이 문을 여는 오후 10시부터는 본격적인 투자시간이다. 런던과 뉴욕에서 동시에 거래가 이뤄지는 12시까지 두 시간가량은 하루 중 외환시세가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때다. 12시쯤 거래를 마치고 하루를 마감하는 식이다.

외환거래 탈세로 유죄 받는 아줌마들

일본 야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올 3월 말 외환거래 계좌 수는 5년 전에 비해 20배 늘어난 105만 계좌에 달한다. 이런 개미투자자들의 엔화 투자 규모는 2006년 초부터 지난해 말까지 2년 새 약 4배로 뛰어올랐다.

도쿄 외환시장의 30%를 차지하는 200조 엔에 달하는 정도니 보통 큰손이 아니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은 세계 금융시장에 유통되는 와타나베 부인들의 돈이 40조 엔(약 387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지난해엔 ‘평범한 주부가 4억 엔 탈세! 외환투자의 실체’라는 제목의 주간지 기사 제목이 심심찮게 나왔다. 외환거래에서 탈세로 유죄판결을 받는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 것이다.

일본 국세청은 최근 지난 1년 동안 외환거래에 따른 개인소득 신고 누락이 224억 엔(약 2165억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도쿄도 세타가야(世田谷)구에 사는 한 60대 주부는 2001년부터 3년간 외환거래로 벌어들인 4억 엔을 은폐하고 소득세 1억4000만 엔을 빼돌렸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도쿄지방재판소는 그에 대한 판결에서 “탈세에 대한 죄책감이 없는 등 납세의식도 매우 낮다”며 거액의 벌금을 선고했다.

이들 와타나베 부인의 활약 때문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일본 엔화는 강세로 돌아섰다. 달러에 대한 엔 환율은 지난 6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106.14엔을 기록했다. 연초엔 달러당 111.48엔을 기록했었다.

엔화 환율은 지난해 6월 달러당 123.91엔을 정점으로 하락세(엔화 강세)를 거듭하고 있다. 엔은 한국 원화에 대해서도 강세를 보여 연초 100엔당 800원 하던 환율이 현재 100엔당 960원대에 거래되고 있다.

일본 아줌마 투자자들은 엔화 약세에 일방적으로 베팅하는 편향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어느 순간 엔화가 강세로 돌변할 경우 아줌마 부대는 물론 외환시장과 국제 금융시장도 엄청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지난해부터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국제 금융위기가 확산되자 이런 현상은 현실로 드러났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인도·브라질 등 신흥시장의 주식 하락·통화 약세를 촉발했고, 이 때문에 와타나베 부인들이 손실을 피하기 위해 전 세계에 투자한 자금을 일부 회수한 것이다. 자금회수 움직임은 엔화가 강세인 동안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국제 경제의 상황이 개선될 경우, 새로운 투자처를 찾아 와타나베 부인들이 꿈틀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본의 금리는 여전히 0.5%에 머물러 있다.

일본 국내 투자환경이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단카이(團塊)세대로 불리는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퇴직으로 앞으로 3년간 50조 엔의 퇴직금과 연금이 와타나베 부인 손에 쥐어지게 된다.

올 3분기 안에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이 110엔 수준까지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도 와타나베 부인들을 자극하고 있다. 올 들어서는 저가 달러 매수를 시작으로 조심스레 투자를 재개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최근 이들 개미투자자의 투자전망을 보도했다. 달러에서 유로, 그리고 고금리의 브릭스(BRICs)국가를 거쳐 자원국가 통화를 노릴 것이라는 내용이다. 한번 외환거래 차익의 단맛을 본 와타나베 부인이 쉽사리 투자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