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9월 15일 짐을 싸 리먼브러더스 본사 건물을 떠나고 있다. |
월가에서 수년간 최전방 트레이더 생활했던 A씨. 그는 입사 후 한 임원이 귀띔해 준 합격 이유를 듣고 허탈했다고 고백한다. 이 임원은 모든 면접관이 A씨가 10대 중반까지 피아노를 전공했던 점을 높이 샀다고 그에게 전했다. 손가락을 놀리는 속도가 빠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0.1초 차이로 수백만 아니 수억 달러를 벌 수도, 잃을 수도 있는 주식과 현물을 사고파는 트레이딩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금융계의 꽃인 트레이더들도 여러 종류가 있다. 이 가운데 최근 수년 동안 몸값 상한가를 쳐왔던 직종이 바로 ‘프랍 트레이더’(Proprietary trader)다. 이들은 고객의 자산을 운용하지 않는다. 이들의 고객은 자신에게 주급을 주는 소속 투자은행이다.
회사의 자산을 굴리면서 다른 트레이더들에 비해 높은 성과급을 받는다. 일반 헤지펀드의 트레이더들처럼 투자은행 소속이면서도 보통 순익의 10% 이상을 챙긴다. 큰 문제는 이처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프랍이 좋은 대우를 받는 이유는 투자은행의 성격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고객의 자산을 불리는 대신 자기 배 채우는 데 급급했다. 파산 신청을 한 리먼브러더스가 2007년 파생상품 등을 통해 끌어들인 7000억 달러 가운데 고객 자산은 230억 달러에 불과했다고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로버트 새뮤얼슨은 9월 18일 지적했다.
무디스 본사의 한 고위 소식통은 9월 19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2001년부터 월스트리트 금융기관들이(자기자본보다 많은 돈을 빌려 투자하는) 레버리지를 너무 많이 올리기 시작했다”며 “파산을 신청한 리먼브러더스도 이에 해당되는데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비정상적으로 올라간 레버리지를 낮춰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미국 투자은행들의 평균 레버리지는 27배였다고 한다.
특히 이 돈은 투자은행들이 자신이 만들어 낸 복잡한 금융 파생상품들을 사고파는 데 쓰였다는 점에서 월가의 도덕성을 짐작하게 해 준다. 지난해부터 전 세계를 금융대란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서브프라임 사태’는 빚을 담보로 빚을 만들어 또 다른 빚에 투자한다는 한 문장으로 단순화할 수 있다. 첫 번째 빚은 부동산이라는 실물자산을 구입하기 위해 은행이나 모기지(주택대출증권)기관에서 개인이 직접 돈을 빌리면서 발생한다.
월가는 이 빚을 쪼개고 묶어서 또 다른 빚(MBS·모기지담보부채권)을 만들었다. 1970년대의 일이다. 문제는 이 중에서 연체되기 시작한 악성 빚을 다시 혼합해 새로운 형태의 빚인 CDO(부채담보부증권)를 만들면서 불거졌다. 이름만 바뀐 빚 덩어리 CDO의 가치가 하락하면 이를 보상하는 보험상품을 만들게 된다. 이것이 신용디폴트 스와프다. 월가의 천재들은 2005년 5월 이 보험상품과 기존의 빚을 섞어 ‘합성 CDO(synthetic CDO)’라는 상품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리먼브러더스는 이 분야의 최고 강자였다.
합성 CDO를 시장에서 팔 수 있도록 신용평가기관 무디스를 설득한 것도 리먼브러더스였다. 곽수종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미국 정부가 AIG는 구제하고 리먼브러더스는 방치한 것은 일종의 괘씸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다른 곳과 달리 리먼브러더스는 부실 규모도 상당히 축소했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차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월가의 큰손 조지 소로스는 ‘시장과 투자자가 서로 영향을 끼친다’는 자신의 이론을 담은 저서 『금융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2008, 위즈덤하우스)에서 현 금융위기를 “60년 동안 진행된 신용팽창 시스템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것”이라고 정의하며 “1972년 이래 줄곧 성장산업이었던 금융산업에서 장기적으로 상업은행이나 투자은행의 성격이 변화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초반에 안정권에 들어 있던 모건스탠리, 골드먼삭스의 위험도도 높아지고 있다. 상업은행들도 금융위기의 한복판에 놓였다. 주가가 많이 빠진 워싱턴뮤추얼, 와코비아는 물론 웰스파고, 시티뱅크 등 대부분의 대형 금융기관은 매각설, 인수합병설에 시달리고 있다. 월가에서 비롯된 금융위기의 여파는 세계 금융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정광수 미 존스홉킨스대 경영학과 교수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서브프라임 사태가 금융기관들의 파산과 인수합병 등으로 그 끝이 가시화되면서 파급력의 연결고리가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도미노가 무너질 때 앞 부분과 뒤편에 있는 것들의 간격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디가 끝나는 지점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게 현재 금융위기의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외환위기 때처럼 둑에 난 구멍이 작으면 물은 차게 마련이므로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2007년 3월 뉴센추리파이낸셜이 모기지 관련 상품 부실에서 비롯된 경영악화로 주식거래가 중지될 때 뉴욕증시(NYSE)의 시가총액은 15조4677억 달러였다. 2008년 9월 16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AIG에 브리지론 형태로 공적자금 850억 달러를 지원하자 뉴욕증시의 시가총액은 하루 만에 600억 달러가 빠졌다.
18개월 동안 뉴욕증시에서 증발된 돈은 총 2조5007억 달러에 달한다. 올 9월 7일 공영 모기지기관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공적자금 2000억 달러 등을 포함해 같은 기간 미국인들이 낸 세금으로 월가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단기 유동성 자금을 제외하고 8140억 달러에 달한다. 사실상의 월가 붕괴로 인한 피해 범위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먼저 수치상 피해액인 3680억~6000억 달러는 금융파생상품 지수인 ABX가 50~70%가량 떨어진 것을 기준으로 추산된 액수다. 월가 붕괴의 피해액이 1조 달러라는 주장은 IMF의 공식 입장이다. 채권 왕으로 통하는 빌 그로스도 전 세계 주요 금융기관들의 손실액수가 1조 달러라고 주장하고 있다.
네덜란드 금융그룹인 CLSA의 크리스토퍼 우드 글로벌 전략가는 최근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리먼브러더스 파산 신청으로 기존 5000억 달러 손실에 1조 달러가 더해질 것”이라는 비관론을 펼쳤다. “유동성이라는 음악이 멈추면 결국 모든 것이 끝나겠지만 음악이 나오는 한 우리는 리듬을 타며 춤을 춰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춤을 즐기고 있다.”
지난해 7월 척 프린스 전 시티뱅크 CEO가 파이낸셜타임스(FT)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 감미로운 음악은 그쳤다. 베어스턴스, 리먼브러더스, 메릴린치가 모두 스텝을 멈추고 장막 뒤로 사라졌다. 문제는 남의 돈을 향한 월가의 욕심은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1980년대 금융상품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금융공학자들인 ‘퀀트’가 월가 투자은행의 핵심 보직으로 자리잡았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압류 위기에 처한 주택 소유주들을 돕겠다며 “복잡한 금융 파생상품으로 피해 규모 산출이 정확하지 않다”고 한 발언을 이끌어 낸 이들이 바로 퀀트다.
반복되는 월가의 과욕
컴퓨터의 발달도 금융상품의 복잡성을 심화시켰다. 과거 수많은 수학자와 경제학자들이 1주일 걸려 7개가량의 상품을 만들었던 데 비해 컴퓨터 기술이 발전하면서 1주일이면 100여 개의 상품을 만들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월가에서는 차입매수(LBO:Leveraged buyout)와 저축대부조합 사건이 발생했다.
1987년 차입매수 거래로 투자수익률이 크게 늘자 연기금 등 대형 투자자들이 차입매수 시장에 몰려 들었다. 관련 상품은 점점 복잡해졌고 빚을 빚으로 갚는 일이 꼬리를 물었다. 1989년 유나이티드에어라인의 차입인수에서 은행들이 발을 빼면서 마침내 거품은 터졌다. 모기지 상품을 운용하던 저축대부조합도 같은 해 막가파식 횡령과 분식회계로 수백억 달러를 공중에 날렸다.
금융산업 경쟁력을 높이려고 미 정부가 사실상 감독기능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월가의 탐욕은 90년대 들어서도 반성의 기미가 없었다. 1998년 아시아와 러시아를 뒤흔든 외환위기 사태와 맞물려 세계 금융산업의 근간을 위협했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사건이 일어난 것. 1993년 시작한 롱텀캐피털은 고위험 채권, 특히 국채에 집중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와 수학자들이 만들어 낸 첨단 금융공학으로 롱텀캐피털의 트레이더들은 차익거래에서 과감한 공매도 전략을 쓰는 등 큰 수익을 올렸다. 1997년 이 회사의 마이런 숄즈와 로버트 머튼은 노벨경제학상을 받기까지 했다. 전직 FRB 부의장과 노벨상 수상자들을 영입해 80년대 월가의 치욕을 벗어나려 했던 롱텀캐피털은 러시아 국채의 수익률이 크게 올라가자 이에 올인했다.
하지만 고성능 컴퓨터와 전직 FRB 부의장의 도덕성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을 예측하지 못했다. 탐욕이 컸던 만큼 파멸의 피해도 컸다. 결국 FRB가 나섰고 36억5000만 달러의 구제금융이 집행됐다. 하지만 이 회사 파트너 중 일부는 지금도 월가에서 일하고 있다. 월가 퀀트와 트레이더들의 몸에 오래전부터 각인된 탐욕과 파멸의 DNA는 2008년 9월 현재까지도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현 상황의 원인을 놓고 투자은행은 신용등급 평가기관들의 책임이라고 떠넘기고, 무디스 등 평가기관들은 투자은행의 탐욕이라 치부한다. 리먼브러더스의 한 직원은 파산 신청을 한 다음날 오후(현지시간) 기자와의 통화에서 “지금은 쇼크 상태라 할 말이 없다”며 “파산 신청을 한 것은 지주회사기 때문에 다른 부문은 조만간 일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투자은행의 한 고위급 소식통도 같은 날 통화에서 “상황은 안 좋지만 곧 잠잠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태풍의 눈은 조용했다. 올봄에 뉴욕주 검찰은 신용평가기관과 투자은행을 집중 조사했다. 신용평가 수수료 지급과 관련된 두 기관의 연결고리는 이로 인해 상당 부분 약해졌다. 재무부도 금융기관에 대한 감시 감독에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금융위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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