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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이 지금 자동차와 TV 살까

도일 남건욱 2008. 9. 27. 18:13
미국인이 지금 자동차와 TV 살까
돈줄 마르는 한국 기업들
기업들 수출 어려워지고 자금난 심화 … 연말부터 실물경제도 타격
월가의 탐욕…파멸

미국 최대 번화가인 타임스퀘어도 예전처럼 북적대지 않는다.

"집값이 떨어지고, 투자한 펀드가 반 토막 났는데 차를 바꾸고 TV를 바꿀 사람이 있겠는가?”국내 대기업의 한 임원은 미국 금융위기가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반문했다. 그는 “미국 시장은 특히 신용으로 대부분의 물건이 구매되기 때문에 금융위기는 곧바로 실물위기로 이어진다”며 답답해 했다. 상대적으로 상품 구매 때 현금 비중이 높은 한국이나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라는 것이다.

서서히 진화(鎭火)의 가닥을 잡아가는 금융위기와 달리 이제는 실물경제가 걱정이다. 개인투자자들이 금융위기가 끝났다고 모든 위기가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주식이나 펀드 투자에 섣불리 나서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9월 17일 국회 현안 보고 자리에서 “글로벌 위기가 금융 쪽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고 실물은 이제 막 시작됐다고도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역시 19일 과천청사에서 개최한 ‘제9차 위기관리대책회의’에서 “미국발 금융위기로 국내 주가가 출렁이고 환율과 유가도 상승세로 돌아서는 가운데 이러한 불안요인이 해외수출과 내수 등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시장을 안정시키고 불안심리를 잠재워야 하는 정책 당국자들까지 조심스럽지만 이런 의견을 피력한 것은 의미 있는 대목이다.

애초 서브프라임 모기론 부실이 터졌을 때 가정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실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 위기설은 모기지론 부실이 투자은행 부실 등 금융위기를 부르고 이 위기가 신용경색, 소비 위축 등 실물경제 위기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미 미국에서는 금융업체 간 인수합병이 진행되고 이에 따른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해 소비 심리가 급속히 위축되고 있다.

미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금융위기로 촉발된 환율 상승은 수출업체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보다는 미국 시장의 위축이 훨씬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주요 기업들의 3분기 예상 실적도 비관적이다. 삼성전자는 분기 영업이익이 다시 1조원 아래로 떨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LG전자, 현대차, 포스코 등도 영업이익이 30% 이상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SK에너지 등 정유업계는 환차손과 정제마진 축소의 이중고에 노출돼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LCD TV와 휴대전화 등 북미 수출 제품들이 경기 흐름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현대차 역시 미국, 중국, 유럽 시장의 위축으로 올해 판매목표를 달성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미국 자동차 시장은 이미 전년 대비 10% 정도 수요가 감소한 상황이고, 이번 사태를 계기로 추가적으로 수요가 더 감소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상대적으로 경기에 덜 민감한 포스코는 당장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세계 경기가 확장에서 축소로 돌아선다면 원자재 수요도 줄어들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곧 발표될 3분기 주요 기업 실적도 지난해보다 나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정보제공업체 에프앤가이드 조사 결과 코스피 상장종목 135개의 3분기 전체 순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 감소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시가총액 20위 종목만 보면 순이익이 14.4% 줄어들 것으로 추정됐다. 문제는 4분기 이후에는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위기로 본격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기업들 유동성 확보 비상…투자 꺼려

물론 기업들은 저마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LG전자 관계자는 “미국 시장에서 이미 프리미엄 제품 위주로 팔고 있기 때문에 금융위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현대차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가격 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불황에 오히려 강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업체들의 이런 주장은 불황(depression) 때 통하는 것이지 위기(crisis) 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위기가 오면 사람들은 일단 어떤 것이든 소비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미국의 금융위기가 한국의 수출에 타격을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의 금융위기가 한국의 주요 수출시장인 유럽과 일본, 나아가 중국의 실물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면서 우리 수출 환경이 더욱 나빠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허찬국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세계적인 실물경기 침체에 금융위기까지 겹쳐 상반기 20%에 달하던 한국의 수출 증가율이 하반기에는 10%대로 낮아질 것 같다”고 말했다. 임지원 JP모건 수석이코노미스트도 “미국과 관련된 위기로 한국 경제는 내년까지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처럼 미국 금융위기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한국과 미국의 경제 연관성을 감안할 때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 있다.

수출뿐 아니라 미국발 금융 불안의 영향으로 주가가 하락하고 기업·가계 대출이 어려워지면서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 등도 당초 예상보다 크게 위축될 것이란 우려도 나오고 있다. 민간경제연구소들은 올해와 내년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기업들도 실물경제 침체에 맞춰 경영 계획을 재조정할 움직임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4%대 초반’에서 더 낮추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조만간 발표할 내년 경제 전망에 지금의 금융위기 상황을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과도한 위기감이라는 반론도 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실물경제에 본격적인 파급은 연말부터 시작될 것”이라면서 “하지만 지금 패닉 상태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 본부장은 “이미 부동산 침체가 3년 전부터 시작됐고, 미국 정부가 신속히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예상할 수 있는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의 수출 경기가 위축되면 경제 전체가 나빠질 수 있고, 이는 최근 부동산 침체, 경기침체로 자금난을 겪고 있는 일부 기업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도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외부 악재라면 건설사를 비롯한 일부 그룹의 자금위기설, 기업들의 실적 악화, 중소기업들의 도산 등 내부 악재가 겹쳐 더 큰 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다. 특히 해외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거나 조건이 나빠져 가뜩이나 자금 위기설에 놓인 기업들에 유동성 위기가 겹칠 수 있다. 기업들이 유동성 확보에 나서면서 투자를 꺼리게 되면 내수 침체는 더욱 심해질 수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요즘은 모든 기업이 현금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고 말했다. 삼성그룹이 최근 사장단협의회에서 “유동성을 체크하겠다”고 한 것은 이런 상황과 관계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최근 골프장 회원권 가격이 하락하는 것도 건설사에서 보유한 물량이 쏟아져 나와 그런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미국 금융위기는 이제 사람들의 피부에 와 닿는 실물위기로 번지고 있다. 아직은 일부 금융권의 장부상 손실이나 고액 연봉자들의 문제에 그치고 있지만 실물경제로 파급되면 피해는 광범위하게 번질 수 있다. 실물위기는 금융위기처럼 간단히 정리할 수도 없다. 개인투자자들은 이제 미국 금융위기가 한국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살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