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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축은행發 ‘부실 도미노’ 우려

도일 남건욱 2008. 9. 27. 18:15
저축은행發 ‘부실 도미노’ 우려
한국 금융위기의 뇌관 PF
드러난 부동산 PF만 97조원 … 한 번 터졌다 하면 연쇄 도산 가능성
저축은행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실물경제가 악영향을 받아 금융권이 다시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생길 수 있다.

흔히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한국은 감기에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이 독감에 걸렸다. 한국은? 당연히 중병을 걱정해야 한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후, 우려가 현실이 되는 분위기다.

증시가 출렁이고, 외환시장이 롤러코스트를 타더니, 상대적으로 잠잠했던 채권시장에서도 외국인이 탈출을 시작했다. 위기인가? 해석은 분분하다. 사실 금융 위기에 대한 명확한 이론이나 기준은 없다.

어떤 경우를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덱스가 없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위기 직전인지, 시작됐는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속 시원한 답도 찾기 어렵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말대로 “판단하기 아주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상황을 놓고 정부·전문가들이 내놓은 진단이 엇갈리는 이유다.

가장 낙관적인 쪽은 정부다. 미국 현지 언론조차 “대공황 이후 최악의 위기” “끝이 안 보인다”고 하는데도, 우리 정부 관료들은 오히려 “불확실성이 사라져 호재”라는 이상한 주장까지 하고 나섰다. 물론 관료라고 다 태평한 것은 아니다. 최근 한승수 국무총리로부터 ‘입조심 경고’를 받았다고 알려진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9월 17일 국회에 출석해 “앞으로 어려운 시기가 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 위기는 어느 정도 시작됐고, 실물경제 위기는 이제부터 시작된다”고 밝혔다. 아마도 최근 정황을 놓고, 가장 현실적인 얘기를 한 당국 책임자로 기억될지 모른다.‘어떤 상태의 안정에 부정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세의 급격한 변화’라는 ‘위기’의 사전적 의미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성태 총재 말마따나 한국 경제, 특히 금융·외환 시장은 분명 위기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로 퍼지는 마당에 우리나라만 위기를 피해 가기는 어렵다. 태평양에서 발생한 태풍이 북진하다가 한반도에 상륙하기 직전 일본이나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행운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다.

주유소 기름탱크에서 터지는 수류탄?

문제는 어쩔 수 없는 대외변수에 의한 위기도 문제지만, 내부적으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금융시장 안정에 해가 될 수 있는 악성 재료가 너무 많다. 가계채무 증가, 중소기업 연체율 상승, 환율 급등락, 부동산 시장 침체 가능성, 금융기관 건전성 악화 등 나쁜 소식뿐이다.

그중에서도 전문가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부동산과 연계된 가계와 기업의 빚이다. 특히 저축은행의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문제가 재앙을 불러오는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우선 가계·기업 대출 문제부터 보자. 가구당 약 4000만원의 빚을 지고 있는 가계 부분은 갈수록 채무 상환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소득은 그대로인데, 금리가 오르면서 2004년 가처분 소득 100원당 6.3원을 이자로 냈던 가계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9.4원을 낸다. ‘빚을 내서 집 사고, 망나니처럼 소비한다’는 비난을 받은 미국 가구보다 가처분 소득 대비 개인부채 비율이 높다. 특히 2006년 하반기 집중됐던 주택담보대출의 경우 이자만 내도 됐던 거치기간이 끝나가면서 대출 원금과 이자를 함께 내는 가구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에 따르면 내년에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아야 하는 가계 주택 대출 규모는 48조원. 올해의 두 배에 달한다. 중소기업 대출 연체율 증가와 함께 빚을 못 갚는 가계가 늘어갈 것이라는 전망은 금융기관 건전성 부분과 맞닿아 있어 위협이 되고 있다. 하지만 가계나 중기 대출 리스크는 폭넓게 분산돼 있다는 점에서 부동산 PF에 비하면 위험도가 덜하다.

 

 

전문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바로 부동산 PF다. 오래전부터 많은 전문가는 “부동산 PF가 한국판 서브프라임 사태를 불러올지 모른다”고 경고해 왔다. 한 외국계 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저축은행 PF 부실이 터질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금융권의 부동산 PF 규모는 97조1000억원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것은 저축은행이 부동산 개발에 참여해 돈을 빌려준 약 12조원이다.

연체율은 6월 말 현재 14.3%(은행 PF 대출 연체율은 0.68%)다. 대략 2조원 정도 연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저축은행이나 금융당국은 이 액수를 가지고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해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현재 금융감독원은 저축은행 PF 사업장 전수조사를 하고 있다. 이 점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왜 금감원은 899곳에 달하는 PF 사업장을 전수조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힌트가 있다.

한 민간경제연구소 연구원은 “정부 관료를 만났는데, 저축은행이 제출한 데이터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더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금감원 관계자는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그는 “그렇다 해도, 전체 PF에서 저축은행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기 때문에 뇌관이라고 하는 건 무리 아니냐”고 반문했다.

저축은행의 부실 정도가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클 수 있지만, 심각한 사태를 몰고 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런데 시장의 생각은 다르다. 저축은행발 PF 부실이 단순히 12조원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현석원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저축은행 PF가 큰 규모라고 보기 어렵지만, 저축은행이 정리되는 과정에서 중소기업에 영향을 줄 것이고, 실물 경제에 악영향을 미쳐 다시 금융권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작은 부분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저축은행 PF 뇌관을 건드리는 직접적인 요인은 부동산 시장이다. 최근 부동산 시장은 버블 붕괴 징후가 뚜렷하다. 아파트만 보더라도 거래는 없고, 집값 상승세는 멈춘 지 오래다. 미분양 아파트가 늘면서, 건설사 연쇄 부도설까지 나돌고 있다. 일부 버블세븐 지역은 버블 붕괴라고 할 수 있는 30% 하락 수준까지 집값이 떨어졌다. 금리가 오르면서 가계 대출자들의 상환 능력도 현저히 나빠지고 있다. 금융 안정도를 지탱하는 부동산 시장 안정, 대출기관 건전성, 대출자 상환 능력 모두 악성인 상태다.

주택시장이 침체하면, 건설사는 유동성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건설사 위기가 금융권으로 옮겨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실제로 부동산 시장이 위축되고 대출금리가 올라가면서 건설사들은 자금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도급순위 300위 안에 드는 국내 건설사들이 금융권에서 빌린 돈이 작년 말 기준으로 105조원이다. 요즘 분위기라면 상환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저축은행과 거래가 많은 지방 중소형 건설사들은 PF 관련 우발채무가 부도 위험으로 이어지는 양상이다. 전국은행연합회 통계에 따르면 시공능력 100위권 내 건설사의 저축은행 대출 의존도는 0.2%인데, 200~300위권 건설사는 8.4%다. 규모가 작은 건설사일수록 저축은행에서 돈을 많이 빌린다는 얘기다.

만약 지방 건설사가 무너지고, 저축은행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으면, 제1금융권의 안전 선호 현상이 높아지고, 신용은 급격히 경색된다. 저축은행 부동산 PF 12조원이 단순히 12조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는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에서도 고스란히 입증됐다. 그런데도 정부는 그동안 이 문제를 깊이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8·21 부동산 대책에도 저축은행 PF 문제는 쏙 빠져 있다.

저축은행 부동산 PF 자체는 핵폭탄급이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수류탄이라 하더라도 어디서 터지느냐가 문제다. 만약 수류탄 안전핀이 뽑혔는데, 그곳이 기름탱크가 가득한 주유소 지하라면? 금감원은 이르면 9월 말께 ‘저축은행 PF의 실체’를 공개할 예정이다. 금융시장 눈과 귀는 이미 9월 말을 향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