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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연구진 호랑이 게놈 세계 처음으로 밝힌다

도일 남건욱 2010. 11. 8. 18:18

국내연구진 호랑이 게놈 세계 처음으로 밝힌다

이달 3일 에버랜드서 한국호랑이 혈액 채취해

2010년 11월 05일

 

이달 3일 경기 용인시에 위치한 에버랜드 동물원. 호랑이 우리에 들어서자 눅눅한 냄새가 났다. 10여㎡남짓 크기의 우리에는 한국호랑이 ‘태극’이 사람들을 반겼다.

2003년에 이곳에서 태어난 수컷 호랑이 태극은 몸길이 214㎝, 몸무게 180㎏으로 매우 건강해보였다. 에버랜드 강철원 사육사는 “호랑이는 사육 상태에서 20~25년 정도 산다”며 “사람으로 치면 태극의 나이는 30대”라고 설명했다.

다른 사육사가 1m남짓 길이의 원통에 마취약을 담은 주사기를 넣었다. 그러고는 태극을 향해 ‘훅’하고 불었다. 3가지 마취약이 5차례에 걸쳐 투여됐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태극은 으르렁 거렸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20여분 지나자 태극은 혓바닥을 내밀고 우리에 누워있었다. 전신 마취가 이뤄지자 사육사들은 태극이 놀라지 않도록 얼굴을 흰 수건으로 가렸다. 안전을 위해 끈으로 다리를 묶었다.

오석현 에버랜드 수의사가 뒷다리 안쪽 허벅지에 솜을 문질러 털 속의 혈관을 찾은 다음 혈액을 채취했다. 이날 채취한 혈액 110mL는 혈액보존용기에 담겨 냉장 보관됐다. 태극의 혈액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선보일 한국호랑이 게놈(유전체) 분석에 쓰인다.

● 100여 차례 반복해 오차율 0.01% 미만으로 해독

게놈연구재단과 에버랜드, 테라젠, 중국 베이징게놈연구소(BGI) 등이 참여한 ‘호랑이 게놈 컨소시엄’ 연구진은 혈액 속에 있는 백혈구의 핵에서 DNA를 추출할 계획이다. 적혈구에는 핵이 없어 DNA를 뽑아낼 수 없다.

DNA는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신(C) 등 네 가지 염기가 수없이 늘어서있다. DNA 염기서열의 순서를 풀어내는 일을 해독이라고 한다. 연구진은 4세대 해독기 ‘하이세크(hiseq)’로 태극의 게놈을 4개월간 90~100차례 반복적으로 해독해 오차율을 0.01%미만으로 줄인다는 계획이다. 오차율이 적을수록 정확한 게놈 지도가 만들어진다.

박종화 게놈연구재단 게놈연구소장은 “내년 3월경이면 세계 첫 호랑이 게놈 지도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태극의 게놈을 분석하는데 13억원 가량이 들고, 호랑이는 28억 개의 염기쌍을 갖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사람은 30억 개의 염기쌍을 갖고 있다.

연구진은 같은 해 10월까지 한국호랑이 외에도 벵골호랑이·인도차이나호랑이 등 10여 마리의 게놈을 추가적으로 완성한다는 계획이다.

● 호랑이 게놈 표준 구축해

이번 연구는 호랑이 게놈 지도를 처음으로 만든다는데 의미가 있다. 환경부가 지정한 멸종위기종 1급 동물인 한국호랑이는 현재 러시아 극동지방에 300~400마리 정도가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경이면 사라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게놈을 알면 한국호랑이를 보존하거나 복원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박 소장은 “유전적으로 가까운 호랑이끼리의 교미를 막아 열성 유전자가 발현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팬더의 게놈을 분석한 중국 BGI 연구진 역시 팬더의 게놈 지도가 팬더를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남식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한국야생동물의학회장)는 “세계 첫 호랑이 게놈 지도의 주인공이 한국호랑이이고, 다른 종류의 호랑이 게놈을 분석할 때 표준으로 쓰인다는 점도 중요한 의미”라고 설명했다.

● 호랑이 진화·생태적인 특징 설명…에이즈 연구 참고자료로

호랑이의 게놈 지도가 만들어지면 호랑이의 계통학적 발생을 좀 더 효과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알려진 호랑이는 모두 9종류다. 이들 가운데 발리호랑이, 카스피호랑이, 자바호랑이는 각각 1940년대, 1950년대, 1960년대에 차례로 멸종했다. 현재는 한국호랑이를 비롯해 벵골호랑이, 인도차이나호랑이, 수마트라호랑이 등 6종이 남았다.

이제까지는 크기나 무늬 형태를 참고해 호랑이를 분류했다. DNA 염기서열 가운데 호랑이 종류마다 다른 특정 염기를 구분해 식별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분이 아닌 전체(게놈 지도)를 비교하면 보다 정확하게 호랑이의 종을 구분하고 종 다양성을 살필 수 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신 교수는 “서로 다른 호랑이의 게놈을 분석하면 호랑이가 여러 종류로 어떻게 갈라졌고 진화과정은 어땠는지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생태적인 특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사자와 홀로 서식하는 호랑이의 게놈을 비교하면 이러한 차이가 어떤 유전자에서 비롯됐는지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데도 좋은 참고자료가 될 전망이다. 가령 고양이과 동물인 호랑이는 ‘고양이 에이즈(FIV)’를 앓는다. FIV는 사람에게서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을 일으키는 바이러스(HIV)와 같은 종류로 면역력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이항 한국야생동물유전자원은행장(서울대 수의학과 교수)은 “호랑이의 게놈에서 어떤 유전자가 FIV와 연관이 있는지를 알면 사람의 게놈에서도 비슷한 역할을 하는 유전자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태섭 동아사이언스 기자 xrock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