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이 법인세를 인하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법인세 인하 논의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
54조9970억원. 2009년 국내 30대 그룹의 순수 설비투자액이다. 전년보다 14% 감소한 금액이다. 법인세 세율을 2억원 초과 구간에선 3%포인트(25%→22%), 2억원 이하에선 1%포인트(11%→10%)로 낮췄는데 투자는 줄었다.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법인세를 인하해 봤자 투자는 부진하지 않은가.”
뭐든지 속을 살펴봐야 실체가 나오는 법이다. 2009년은 세계 불황이 한창이었다. 투자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다. 투자가 감소했다고 보기 힘든 면도 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진 직후 30대 그룹은 투자 목표를 50조원 선으로 줄였다. 그래도 실제 투자액이 55조원에 육박했으니 계획보단 6%가량 증가한 셈이다. 법인세마저 인하되지 않았다면? 투자는 더 줄었을지 모른다.
법인세율 인하해도 세수는 늘어
실제 세계 경기에 약하나마 훈풍이 분 2010년 투자 규모는 확대된다. 삼성전자는 올해 총 26조원을 투자했다. 사상 최대 규모다. 시장에서 예상하는 삼성전자의 올해 영업이익은 20조원 안팎. 벌어들인 것보다 많은 규모를 투자한다는 것이다. LG그룹도 2009년보다 28% 증가한 15조원을 투자에 쏟아부었다. 포스코, 롯데그룹 등 상당수 대기업도 올해 투자 계획을 ‘사상 최대’로 잡았다. 전경련은 “30대 그룹의 설비투자는 전년비 18%가량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법인세 감세 철회 논란이 거세다. 2012년까지 시행이 유보된 법인세 최고세율 2%포인트 인하(22%→20%) 계획의 백지화가 쟁점이다. 철회의 근거는 이렇다. 법인세를 감면해도 투자가 늘거나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다는 거다. 법인세 감세액의 60% 이상이 대기업에 쏠린다는 비판도 있다. 부자 감세론의 핵심이다.
과연 그럴까. 일단 법인세 구조부터 알아보자. 한국의 법인세는 초과 누진세율 구조다. 과표구간 2억원 초과는 22%, 2억원 이하는 10%를 낸다. 과표구간은 과세표준의 구간을 말한다. 대개 결산서상의 ‘당기순손익+손(損)금불산입-익(益)금불산입’으로 정한다. 손금불산입은 기업회계에선 비용으로 인정돼도 세무회계에선 손금으로 처리하지 않는 걸 말한다. 과태료·가산세 등이다. 익금 불산입은 기업회계상 뚜렷한 이익이지만 법인세법에는 반영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과세표준에 따라 22%, 10%의 세율을 각각 매긴다. 예를 들어 과세표준이 5억원이라고 하자. 2억원엔 10%의 세율이 붙어 1000만원의 세금이 나온다. 나머지 3억원엔 22%를 붙인다. 6600만원이다. 총 세금은 7600만원이다. 이번엔 최고세율 2%포인트를 인하했다고 치자. 7600만원의 세금은 7000만원으로 준다.
법인세 인하의 핵심은 경기부양이다. 법인세를 내리면 기업투자가 활발해지고 외국 자본 유치가 쉬워 경제성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패널 분석을 통해 법인세율 5%포인트를 인하하면 자본 대비 투자 비율이 1.9% 증가한다는 이론적 결과를 내놨다. 일본의 다이치생명연구소는 일본이 선진국 중 최고인 40%에 달하는 법인세율을 10%포인트 내릴 경우 향후 10년 동안 GDP(국내총생산)가 5조9000억 엔 증대되고, 외국계 기업 투자가 크게 늘어나는 효과가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이런 효과 때문에 세계 각국은 너나없이 법인세를 인하한다. 영국은 2008년 법인세율을 30%에서 28%로 낮췄다. 향후 4년간 이를 4%포인트 더 낮출 계획이다. 대만은 2008년 25%에서 20%로 낮췄다. 최근엔 이를 3%포인트가량 더 낮출 계획이다. 우둔이 대만 행정원장(총리)는 지난 4월 “아시아 다른 국가를 제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법인세율을 낮출 계획”이라면서 “현재 수준에서 17%가량 낮출 예정”이라고 말했다. 20%에서 18%로 낮춘 싱가포르는 17%로 더 낮출 계획이다.
법인세율↑ 자본 이탈 가속화
이는 한국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음을 예고한다. 법인세는 일반적으로 법인 분야에 투입된 자본에 대한 과세로 통한다. 법인의 조세 부담이 증가하면 기업에 대한 투자수익률이 하락한다. 주주로선 투자수익률이 낮은 법인에 굳이 자본을 투입할 이유가 없어진다. 결과적으로 자본 공급이 줄어든다는 얘기다.
문제는 급속한 세계화에 따라 자본 이동이 국경을 손쉽게 넘나든다는 것이다. 한국의 법인세율이 높으면 외국 투자자로선 국내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해외로 빠져나가면 그만이다. 법인세율이 낮은 대만 등으로 말이다. 대만이 법인세율을 거듭 낮추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난해 대만에 대한 외국인 직접 투자는 48억 달러로 1년 전의 82억 달러에 비해 41%나 급감했다.
CJ경영연구소 김정호 상무는 “법인세 인하는 투자·소비 확대를 유도하고 이윤·소득 증가로 나타난다”며 “기업의 투자활동을 확대하고 고용을 증대해 국민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김 상무는 또 “다국적기업은 소득과 설비를 세계 곳곳으로 옮길 수 있다”며 “법인세율이 높으면 당연히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택하지 않겠는가”라고 꼬집었다.
법인세 최고세율 인하는 부자 감세가 아니다. 신고법인 중 법인세를 내지 않는 곳은 44%에 달한다. 이미 면세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정부가 감세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반대로 소득금액 기준으로 상위 10% 법인이 전체 법인세의 96%를 부담한다. 설사 최고세율을 2% 인하한다 해도 부자 감세로 몰아붙이는 건 온당치 않다. 인천대 옥동석(경제학) 교수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인세를 인하하면 기업의 재무구조가 개선되기 때문에 주주·경영자·근로자, 그리고 해당 기업과 거래하는 모든 거래자가 혜택을 본다. 다시 말해 법인세 인하로 부자 기업만 혜택을 보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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