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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그플레이션인가, 아닌가. 국내외에서 경기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물가상승 압력도 높아지자 경제 전문가 사이에서 스태그플레이션 논란이 한창이다. 저성장 고물가로 특징 지을 수 있는 스태크플레이션이 엄습한 것인가. 아니면 경기하강 국면에서 물가도 오르는 상황에 놓여 있을 뿐인가.
스태그플레이션 논란은 10월 초 올 3분기 누적 경제실적 통계가 나오면서 불거졌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4.3% 올라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올해 9개월 동안 평균 4.5% 올라 한국은행의 물가안정 목표치인 평균 4%를 이미 넘었다. 이와 달리 한국의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전년 동기 대비)은 지난해 1분기 8.5%로 고점을 찍고 계속 떨어지고 있다. 올해 2분기는 3.4%를 기록해 물가상승률보다 낮았다. 사정이 이렇자 ‘사실상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경제 전망이 어둡다는 부정적인 의견이 번지면서 스태그플레이션 논란이 촉발된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을 인정하는 경제 전문가들은 “스태그플레이션에 이미 진입했거나 목전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만우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3%대 성장률은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성장”이라며 “이제까지 중첩된 물가상승률 수준은 6%대로 위험한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 이미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 진입했고, 6개월 이상 심각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표로 드러났다 vs 좀 더 지켜보자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 역시 “이미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했다”며 “성장률이 잠재성장률 이하로 떨어졌고, 동시에 물가가 물가안정 목표를 초과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전 교수는 “선진국 경기 불안이 지속화되는 데다 내수도 부진한 상황이어서 이번 경기침체는 제법 오랫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금융연구원의 김동환 선임연구위원도 비슷한 입장이다. 그는 최근 발표한 보고서 ‘성장-물가의 딜레마와 정책대응’에서 “한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질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한국 경제는 구조적으로 생산재 물가가 환율 변동에 구조적으로 취약하고 수출 및 대기업의 성장동력이 한계에 이르는 등 공급 측 제약요인이 산적해 있다”며 “최근 주요 수출대상국이 경기침체에 빠져들어 대내외적으로 총수요가 확대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수입 물가마저 상당 기간 급등할 경우 경기하락과 물가상승이 동시에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김 위원은 그러나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 오랫동안 이어질 것으로 보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디플레이션으로 국면이 바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이다. 그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 일정 기간 지속되면 총수요가 급격히 감소해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김 위원은 1990년 일본의 예를 들어 경기가 위축되는 가운데 물가상승을 막으려고 금리를 올렸다가 자산버블이 꺼져 ‘잃어버린 10년’에 빠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 달리 증권가에서는 다소 온건한 전망을 내놨다. 스태그플레이션이라도 그리 심각하지 않은 수준이거나, 표면적으로만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관측이다. 신동준 동부증권 투자전략본부장은 “현재 경제지표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미니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라고 본다”며 “과거 스태그플레이션이 심각했던 시기처럼 물가가 7~8%대까지 오르고 성장률이 0% 수준까지 떨어진 건 아니다”고 설명했다. 다만 스태그플레이션에 준하는 상황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봤다.
신 본부장은 “경기회복 여부가 상당 부분 유럽 경제에 달려 있기 때문에 적어도 내년 상반기까지는 고물가와 경기둔화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철수 대우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단정짓기 애매하다”며 “물가가 높긴 하지만 피크아웃(고점을 벗어남) 중이고, 특히 스태그플레이션을 야기하는 대표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해외 원자재 가격 급등세가 현재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현재 상황을 전통적인 의미의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보기보단 “고물가와 저성장의 중첩 양상”이라고 분석했다. 서 팀장은 “하나의 원인에 따라 저성장과 고물가 현상이 빚어진다면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각각 다른 원인으로 개별 지표가 악화된 상황”이라며 “경기는 유럽위기, 물가는 금융위기 회복 후유증 때문이라서 전통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전문가 의견 십인십색
현재 상황을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볼 수 없다는 의견도 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4%대 물가 수준이 낮은 건 아니지만 성장률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판단은 달라진다”며 “현재 상황으로 보면 성장은 둔화되지만 침체는 아니며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하려면 굉장히 높은 고물가 상황이 돼야 하는데 현재 그렇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권 실장은 “스태그플레이션이 되려면 물가가 제어되지 못할 정도가 돼야 할 텐데, 현재 경기상황이 더 나빠지면 바로 (스태그플레이션이 아니라) 더블딥으로 갈 가능성이 있어 물가는 자연히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도 스태그플레이션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는 “스태그플레이션은 흔히 (원자재·유가 등에서의) 공급 충격을 일컫는데, 전망을 보면 수요 부족으로 유가 등의 가격이 하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또 “IMF(국제통화기금)나 유력한 투자은행 등의 성장률 전망을 보면 아시아가 4%대 성장을 유지할 것으로 보고 있다”며 “한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들어갈 가능성은 작다”고 전망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경제상황을 국면으로 바라보는 것과 순환으로 바라보는 건 다르다”며 “숫자만 놓고 보면 스태그플레이션처럼 보이겠지만, 거시경제가 가진 동역학(Dynamics)적인 면을 감안하면 사이클에 따라 경제상황이 변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간을 두고 보면 경기순환으로 성장률 감소 정도에 따라 인플레이션도 잦아든다는 설명이다.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보느냐 마느냐는 시장과 정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대책이 달라질 수 있다. 현재 경기둔화의 큰 원인은 유럽발 위기와 미국 경제둔화, 중국 경제의 둔화를 꼽을 수 있다. 물가의 경우 저금리 정책에 따른 통화량 팽창과 환율 급등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이 문제다.
실제로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들어서면 저성장으로 실업률이 크게 증가하는 데다 고물가로 소비 여력이 줄어든다. 경제가 순환되지 않아 특히 서민 삶의 질이 크게 나빠질 수 있다.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기 때문이다. 자연히 세수가 줄어 정부 재정여력도 축소된다.
이런 악순환이 이어지면 생산이 줄어들면서 경기는 더욱 나빠지고, 공급이 부족해져 물가도 더욱 오를 수 있다. 정부가 부양책을 쓰거나 한국은행이 금리를 내리면 물가를 잡기 어렵고, 반대로 긴축정책을 쓰거나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더욱 후퇴해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
현재 상황이 스태그플레이션이냐 아니냐를 떠나 분명 위기라는 건 전문가들이 대체로 동의한다.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 이만우 교수는 유럽발 위기와 함께 중국의 부진을 심각한 원인으로 꼽았다. 특히 중국 부동산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할 경우 한국 경기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조심스러운 금리정책으로 물가부터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가가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분석에서다.
전성인 교수는 현재 상황을 “지나친 수출 의존적 성장전략의 한계”라고 짚었다. 전 교수는 “이런 상황을 극복하려면 건설경기 부양과 같은 단기적 처방이 아니라 전반적인 내수 부양책을 써야 한다”며 “장기적으로는 물가인상에 대한 기대심리를 불식해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동환 위원은 “성장률을 높이기 위해 수요를 자극하면 물가가 더욱 올라 서민들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고,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가계부채 부담이 가중돼 자산시장이 침체되면서 장기 불황을 부추길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장기적인 대안으로 “천연자원 개발 및 투자, 대체에너지원 등 녹색산업을 육성해 대외 의존도를 낮추고 중소·중견기업을 중심으로 고용 유발형 신성장동력을 육성해야 한다”며 “범정부, 국가 차원의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가부터 잡아라” 등 해법도 다양
은행권의 한 전문가는 “현재의 위기가 국제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세계 각국이 공조하고 있지만 해결책이라는 게 결국 유동성을 활용하는 것이어서 한국 물가에는 위협이 될 것”이라며 “유동성 공급과 중단이 번갈아 이뤄지면서 스태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우려가 점증되는 악순환이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한국 물가가 높긴 하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경기 상황이 다소 호전되면 금리를 조금 빨리 올려 물가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권순우 실장은 “유럽 상황이 어려워져 경기가 더 나빠지면 수요가 줄어들면서 물가가 크게 오르지는 못할 것”이라며 “세계적으로도 원자재·유가가 떨어질 가능성도 있어 물가도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석유파동처럼 공급체인이 끊겨 발생한 문제라면 이를 회복하는 게 필요할 것이고, 기대인플레이션 때문에 발생한 거라면 통화당국에서 통화정책의 신뢰를 회복하는 게 필요하다”며 “그 밖에 다른 처방은 경제정책 이외의 정치문제”라고 말했다.
■ 스태그플레이션이 뭐길래
실증적 분석 부족해 논쟁 대상 자주 거론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은 경기침체(stagnation)와 물가상승(inflation)이 동반되는 상황을 말한다. 흔히 ‘저성장·고물가 상황’으로 인식한다. 저성장 시기에도 물가가 계속 상승하는 상태나 물가가 상승해 저성장하는 현상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스태그플레이션은 경제학자들 사이의 오래된 논쟁 주제다. 대공항 이후 상승세를 보이던 세계경제는 1973~79년 제1차, 제2차 오일쇼크를 경험한다. 급격히 오른 유가 때문에 물가가 급속히 올랐다. 이는 경기와 무관한데도 침체를 맞았다. 대공항의 대안으로 떠올랐던 케인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고, 그를 조롱하던 거시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일쇼크 시기 미국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렸고, 그에 따라 경기는 더욱 침체됐다. 이후 스태그플레이션은 반케인스학파가 케인스학파의 오류를 증명하기 위해 종종 들고나오는 주제로 고착화됐다. 1979~82년 이 문제에 본격적으로 접근한 학자는 폴 크루그먼이다. 그는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이 가격을 결정해 높은 실업률에도 인플레이션이 유지될 수 있다고 봤다. 이에 따라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태그플레이션 논쟁이 자주 일어나는 건 기본적으로 이런 현상이 학술적으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란 주장도 있다. 양동휴(경제사) 서울대 교수는 “아직 실증적 분석이 덜 된 개념”이라며 “1970년대 말 잠깐 나타난 후 거시경제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이만우 교수도 “스태그플레이션은 사실 경제학 용어가 아니라 언론에서 사용하는 용어”라고 말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디플레이션으로 전이된 대표적인 사례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이다.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은 0%대 성장률을 지속하는 장기 침체를 경험했다. 기업활동이 어려워지면서 부동산으로 투자금이 몰렸다. 일본 정부는 재정지출을 확대했지만 물가만 올리는 결과를 얻었다. 1997년 물가를 잡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긴축에 들어간 일본은 1998년 경기급락을 경험했다. 결국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져 이제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올 초 유가 급등기에 IEA(국제에너지기구) 파티 비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월가에 뿌려진 유동성이 회수되지 않는 상황에서 맞는 유가 급등이 세계 경제회복을 위협한다”면서 유가에 따른 세계 스태그플레이션을 경고하기도 했다.
박상주 이코노미스트 기자 sa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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