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박지원 왈 '박정희는 친일과 종북의 원조'
그렇다면 박지원은?
어디 이것뿐인가? 박지원의 조부 박낙종,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http://blog.chosun.com/noscum/5035881
아이고 박지원 의원님 친일이시네요 ㅋㅋㅋ
지가 뭔데 박정희를 친일이라 깜?
당신이 그럴 만한 자격이 있습니까?
뭐... 그래도 박지원 의원께서 저렇게 박정희 대통령을 맹공하시는 건
자기보다 더 한 친일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그렇다면 박 대통령의 친일 논란에 대해 한 번 알아 봅시다,
1. 박정희 대통령의 교사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문경 심상소학교 교사였다는 건알 만 한 분들은 다 아시죠?
그 시절 학생들의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정순옥(鄭順玉)의 말)
어느 일요일, 동무들 몇 명과 함께 새로 오신 선생님(박정희)의 하숙 집을 찾아갔다. 호기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방을 살펴봤더니 책상 위에 커다란 사진액자가 걸려 있는데 배가 불룩 나오고 앞가슴 양편에 단추가 죽 달려 있는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영웅 나폴레옹"이라고 하시며 나폴레옹에 대하여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다.
4월 어느날 소풍을 가게 되어 고운 옷으로 갈아 입고 여러 가지 음식을 가지고 떠났다. 선생님은 등산복 차림에 어깨엔 나팔을 메고 길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장난을 치거나 줄이 흐트러지면 한 대씩 때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놀고 있는데 한 아이가 깊은 물에 빠져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박 선생님이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참 만에 그 아이를 건져내어 인공호흡을 시키는 것이었다. 다른 선생님들은 그 동안 둑에서 발만 둥둥 구르고 계셨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박 선생님과 일본인 선생님 두 분과 함께 놀게 되었다. 그때 일본이 선생 한 분이 조선 여성은 예의가 없다느니, 젖가슴을 다 드러내고 물동이를 이고 다니느니 하며 우리 나라 여자의 흉을 보았다. 이에 박 선생님은 우리들에게"너희들 저 말 잘 새겨 들어라. 가난하고 무지하면 남에게 멸시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들끼리 있을 때는 절대로 일본말을 쓰지 말고 조선말을 쓰자"고 했을 때 우리는 철없이"조선말 쓰면 퇴학 당하는데 왜 그러세요"하고 반박한 기억이난다.
그러나 우리는 선생님을 가장 존경하며 따랐다.
(주영배(周永培)의 말)
1939년, 내가 보통학교 5학년일 때 조선어 과목을 가르치며 박 선생님께서는 "이 글을 잘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박 선생님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 분이었다. 가정실습 때는 문경에서 1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산골까지 자전거를 타고 오셨다. 선생님이 돌아가시는 그 뒷모습이 산록으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다.
(전경숙(全慶淑)의 말)
박 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하숙을 옮겼다. 그리하여 우리 어머니를"모친"이라고 불렀다. 식사는 가리는 것이 없었고 복장은 단정하였으며 출근은 빨랐다. 언제나 숙제를 내주시고 철저히 검사하여 평가를 해주셨다. 월요일마다 공책을 점검하시고 글씨를 바르게 쓰도록 지도해 주시고 일기와 편지쓰기를 장려하였다. 5학년 20명과 2학년40명을 한교실에서 복식수업(複式授業)을 하면서도 질서가 정연했다.
말은 간단명료하였으며 청소에 신경을 쓰고 유리창, 천정의 거미줄, 화장실 청소를 철저히 시켰다. 그리하여 청소도구를 완비하여 가지런히 정리 정돈되도록 하였으며 책상의 줄이 비뚤어지고 환경이 지저분한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위인전 같은 이야기를 자주 해주시고 "너희들도 이와 같은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다. 노래와 나팔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악대와 합창반도 조직하여 각종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가을운동회 때는 박 선생이 기마전, 기둥 넘기기, 공바구니 터뜨리기, 텀블링을 지도하여 관중들의 박수를 받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소풍 때 문경새재를 갔을 적에는 제1관문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시고 점심을 싸오지 못한 학생은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주시던일, 발목을 삐어 걸음이 곤란한 학생을 업고 산길을 내려오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이영태(李永泰)의 말)
조선어 시간에는 우리 나라의 태극기와 역사를 가르쳐 주셨다. 음악시간에는 <황성옛터><심청의 노래> 등을 가르쳐 주시고 기타도 쳐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조국이 없는 서러움 때문인지 일본인 교사들과는 자주 싸우는 광경을 보았다. 하루는 수석교사였던 일본이 야나자와(柳澤)와 말다툼 끝에 그가 <조선놈>이라고 하자 의자를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그 당시 일본인 순사 중에 오가와(小川)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와 자주 논쟁을 벌였다. 박 선생님이 만주군관학교에서 군도를 차고 문경에 왔을 때 오가와(小川)가 무어라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전도인(錢道寅)의 말)
하루는 박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혼자 사무를 보고 있으면서 나를 불렀다. 그때 일본인 청부업자 한 명이 담배를 문 채 교무실 안으로 들어와 박 선생님에게 "오이! 교장 계신가?"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일본인을 한 번 힐끗 쳐다보고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 사람이 재차 똑같이 묻자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일본인들이 부르짖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진실이라면 당신이 내게 그러한 언동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등 국민으로 자처하고 싶거든 우선 교양 있는 국민이 돼야지, 담배를 물고 교무실에 들어온 것만 해도 무례하기 그지없는데 언동까지 몰상식한 인간이라면 나는 너같은 사람을 상대할 수가 없다. 어서 나가봐!"
하고 말한 적이 있다.
(황실광의 말)
박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나는 6학년 반장을 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쳤다. 역사, 시조도 가르치고 학생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위인전을 많이 읽도록 하셨다.
박 선생님이 일제치하에서 우리글을 가르치기 위해 애쓰신 것은 분명하다. 학생 한 사람을 복도에 세워놓고 일본인 교장이나 교사가 오지 않나 망을 보게 했다.
그때 한 남학생이 천황의 사진에다 장난을 하고 교무실에 불려가 혼이 난 일이 있다. 천황의 눈을 연필로 까맣게 지우는 따위의 행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들에게 그런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은 박 선생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선생님의 별명은<호랑이 선생님>이었으나 자주 부르지는 못했다. 나는 졸업 때 앨범을 선물로 받았다.
이순희의 말
일어 상용(常用)으로 학교에서 조선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박정희는 수업시간에 몰래 조선어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한번은 둥근 원을 그려 그 속에 가로로 물결무늬를 그려 넣고는
“보기만 해! 이게 조선 국기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곤 그림을 찢어버렸는데 한 학생이 다른 반에 가서 자랑한 것이
일본인 교사 귀에 들어가 ‘불온교사’로 찍혔다는 것이다.
자 이래도 친일입니까? 푸하하...
2. 만주군관학교의 박정희
그러면 여러분은
'박정희가 교사 시절에 진짜 저랬다고 해도 결국 만주군관학교 들어갔잖아?
박정희=변절자 그러니까 결론은 친일 ㄲㄲ'
하실 겁니다.
자 잠깐 여러분, 일본군에 복무했다고 다 친일파로 모는 게 타당한 걸까요?
이건 '김백일'이라고 흥남철수작전을 지휘한 다른 분에 대한 얘기지만,
일본군에 있었다고 친일이면
워싱턴도 친영파인가요? 푸하하하하하하하....
국공합작 하여 항일항쟁 주도한 장제스도 여러분 말대로라면 친일파겠네요.
일본을 그토록 혐오했던 이우 황자 역시 일본 육사 출신이니까 친일이네요.
그리고 '일본군 복무하면 닥치고 친일' 이 논리대로라면 김대중 대통령도 친일 아닌가요?
목포상고 졸업앨범입니다.
빨간 원 안에 있는 사람이 목포상고 학생회장이었던 김대중입니다.
고등학생이 사회 유지로 여겨지던 시대에 목포상고 회장은 그 지역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여운형이 조선인 황군 지원 권유 격문을 쓰던 바로 그때에 김대중이 몸소 일본군복을 입고 연극 공연을 하며 졸업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마자 여운형씨의 공산당 조직은 건준으로 변신하는데, 이때 김대중이 목포지부 간부가 되었습니다.
즉, 김대중은 친일파 여운형의 추종자였으며,
일본군복을 입고 대일본 제국을 위해 나가서 싸우자며
조선인 학생들을 선동했던 그 행동 대장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당시 일본군복입니다. 김대중이 입고 있는 것과 100% 일치하죠.
학도병이라도 일본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황제로부터 봉급을 받는 군인은 누구든 반드시 저 복장 차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기준을 갖고 본다면
김대중은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친일파였던 거죠.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짤 두 개만 더 첨부할게요...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서 학생 대표로 축사를 읽었다는 말이 있는데
생도 대표 이름 잘 보세요.
결론. 개구라.
3. 만주국과 일본
그리고 박정희는 일본 육사가 아닌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만주국군이 일본군이었다면
이런 불온교사 경력의 박정희는 신원조회에 걸려 절대로 사관학교로 진학할 수 없었고,
입학 후에도 곧 입학이 취소되었겠죠.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만주국은 일본의 신원조회망을 벗어난 제3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그러니까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만주군이었던 것입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박정희의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만주군관학교에서 두 차례나 입학을 거부했다고 하는데,
박정희를 일본 황국신민화 정책에 이용하기 위해 만주군관학교에 보낸 것이라는 그들의 주장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만약 일본이 박정희가 일본군이 되기를 원했다면
무엇하러 나이 트집을 잡아 두차례씩이나 불합격시켰을까요?
어차피 충성하겠다는 의지가 중요한 건데요.
박정희는 1940년 2월 불온교사로 찍혀 문경의 교사직에서 면직되었고, 바로 그 다음 달, 즉 1940년 4월 4일에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3수하려면 2~3년 걸리는데 어떻게 3월 한 달 사이에 3수할 수 있었을까요?
만주국은 일본이 만든 나라 맞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만주군을 일본군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만주국은 엄연한 독립국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무지한 사람들은 만주국에서 근무하면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대 사람들에게는 행정상뿐만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만주국이 일본과 혼동될 수 없음이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만약 만주국이 일본 통치권 안에 있었으면 만주국 경찰로 복무했던 광복군 대장의 조카 김일련은 일본 신원조회에 걸렸을 것입니다.
발해의 유민 후예들이 거주하던 간도는 우리땅임을 알던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조선인이 만주국 건국에 동참하면 친일파라는 정서가 전혀 없었습니다.
위는 일본 인명사전에 기록된 박정희의 경력입니다.
중앙의 19-7이라는 연대 표시 바로 옆에 박정희는 "만주국군 소위"였음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국군이었디면 일본군(日本軍)이라고 명기하였겠죠. 그러나 외국군이었기에 만주국군이라고 한 겁니다.
일본인들이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다는데, 도대체 왜 한국의 어떤 무지한 이들은 박정희가 일본군이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나요?
박정희는 유학생이었으며, 유학생은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한국 육사에도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유학생이 옵니다.
만약 아프리카 사람들이 한국 육사에 유학했던 아프리카 군인을 한국군이라 부르면 우리가 무슨 생각이 들까요? 마찬가지인 겁니다.
위에 네째 줄에 보면 "일본육군사관학교 유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일본육사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포병학교 과정을 일년간 이수한 겁니다.
1940년대의 일본 육사 유학생반을 보면 유학생들은 일본사관생도 제복도 입지 않았을 뿐더러 수업도 유학생들끼리 따로 받았습니다.
위의 박정희 학력에 57기생 상당으로 되어있을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아 김대중이고 뭐시고... 워싱턴 장제스는 그렇다 치자. 박정희는 혈서까지 쓴 X끼잖아' 하겠죠.
자, 좋아요. 그럼 이제 박정희 혈서 들어갑니다.
4. 박정희 혈서 진위여부 논란
여러분이 좋아하는 친일혈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1939년 3월 31일 만주일보에 공개되었다네요.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문경 심상소학교 재직 당시 동료교사였던 유증선 씨의 증언이 나옵니다.
"1938년 5월 숙직실에서 만주군관학교 입학적령 20세에 걸려 고민하는 박정희에게 유증선이 충고하길
나이도 한 살 정도 줄이고 편지와 함께 혈서를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즉석에서 면도칼로 새끼 손가락을 그어 '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는 혈서를 바쳤고
만주신문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①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이 20세라는 부분과
②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말한 부분입니다.
일단, 만주군관학교 입학제한 연령은 몇 살이었을까요?
관련하여 쇼와 14년에 작성된
『陸軍預科士官學校生徒、陸軍經理學校予科生徒及陸軍幼年學校生徒召募告示の件』이라는 일제의 공문서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보면 응시자격 연령이 16세 이상 ~ 20세 미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증선이 증언한 바 당시 1938년이면 박정희 나이가 22세일때인데,
한 두살 낮춘다고 응시자격이 생겼을리가 없겠죠.
이쯤에서 유증선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게다가 중앙일보 지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상유 선생의 지적처럼
박정희는 1939년 10월에 시험을 쳤기 때문에,
그로부터 1년 5개월 전에 혈서를 보냈다는 얘기는 여러모로 의심이 가네요.
당시에는 모집여부 조차도 알 수가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1939년에야 만주군관학교 설립에 관한 얘기들이 나왔기 때문이죠.
결정적으로 유증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박정희는 대구사범시절 재학시절 교련과목 이수자여서
하사관 자격이 있었습니다.
하사관 자격이 있는 자는 위의 제한연령 규정에도 불구하고 26세 미만까지 지원할 수 있었으므로 박정희가 나이 문제로 고민했네 어쨌네 하는 것은
개구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 믿으실까봐 증거자료 첨부합니다.
(출처는 앞의 왜말 문서와 같습니다)
두번째로 나이를 한 살 줄였다고 한 부분을 보겠습니다.
1945년 일제가 작성한『임시육군군인군속계』상에 나타난 박정희의 생년월일을 보면 대정 6년(1917년) 9월 30일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의 실제 음력 생일과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박정희는 나이를 고친 적이 없는 거죠.
혈서 위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앞서 혈서가 공개된 신문이 1939년 만주일보라고 했는데
만주일보는 1908년에 폐간되었다는 게 밝혀졌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입니다.
이에 당황한 민족문제연구소(박정희 혈서 떡밥을 공개한 데)는
만주일보가 아닌 만주신문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알 거면 제대로 알고 까시든가...
게다가 만주신문은 만주어와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던 만주국 국민들도 전혀 안 보는 신문이었으며, 일본인들도 안 보는 신문이었습니다.
더 웃기는 건 1939년 2월 24일에 이미 만주군관학교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왜 기사는 1939년 3월 31일에 나왔을까요?
여러분이 알아서 판단하십시오.
혈서 이야기는 이것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의 혈서지원설을 입증하기 위해 제출한 만주일보 사본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 29일 치안부(治安部) 군정사(軍政司) 징모과(徵募課)로 조선 경상북도 문경 서부 공립소학교 훈도 박정희군(23)의 열렬한 군관지원 편지가 호적등본, 이력서, 교련검정합격 증명서, 그리고 ‘한목숨 다바쳐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는 혈서를 쓴 종이와 함께 동봉된 등기로 도착해 담당자를 감격시켰다."
징모를 말그대로 풀이하면 징집과 모병을 뜻하는데,
만주국이 국병법에 따라 징병제를 실시한 것은 1941년입니다.
징모라는 말은 상당히 어폐가 있는 것이지요.
만주국 발행 정부공보를 아무리 뒤져봐도 징모과는 찾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혈서를 썼다는 1938년 9월 무렵 만주군관학교의 모태인 중앙육군훈련처의 군관후보생 모집공고를 보면
치안부 군형과(軍衡課)에서 채용공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출한 신문기사의 진위가 또한번 되네요.
징모과라는 부서는 있지도 않은 유령부서이며,
징병제를 실시할 무렵에 정모과라는 부서가 존재했지만 이 또한 징모과와는 엄연히 다른 부서입니다.
분명 '재신경칙위치안부군형과'라고 되어 있네요.
존재하지 않는 부서에 혈서를 제출한 박정희의 정체는?
5. 창씨개명 했다?
창씨개명 하면 친일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일본명 도요타 다이쥬)을 포함한 국민의 80%가 창씨개명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국민의 80%가 친일파겠네요.
혹자는
"창씨개명 한 게 죄가 아니라, 두 번 한 게 죄다"라고 합니다.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었는데
그 이름이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 하여
나중에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꿨다는 소문이 있는데,
여기서 잠깐, 오카모토 미노루는?
1929년의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공(?)을 세운
사이비교육자인 한 왜놈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입니다.
이를 반박하고자,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 동기동창으로서
인하대 학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울산에 거주하시며 온라인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 김병희 옹의 말을 퍼왔습니다.
김병기 옹의 홈페이지인 http://home.megapass.co.kr/~gimbyngh/ 들어가면 보실 수 있습니다.
"필자(김병희)는 홈페이지[http://home.megapass.co.kr/~gimbyngh/]를 가지고 있어서, 지구촌 사람이면 누구든지 마음대로 와서 구경도 하고 글도 쓸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오늘 새벽에는 "이상유"라는 분이 오셔서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은 사연을 보았다["…"은 수십 자씩 생략했음을 뜻함]:
"저는 서울에서 근무하는 교사 이상유입니다. …
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
박 대통령에 대한 근거 없는 음해가 많았지만, …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다른 창씨 명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악질적입니다. …
그러다가 인터넷을 검색하던 중 정말 우연치 않게
박사님과 고민철 씨가 게시판에서 주고 받은 글을 보게 되었는데,
그 곳에는 제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다니던 오카모토 미노루의 비밀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
순간 박대통령을 음해에 앞장서던 김삼웅이 떠올라 치를 떨었습니다.
김삼웅은 독립기념관장을 하던 중에도 신촌의 서점에서 가끔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
이제 박대통령이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음해가 사실이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를 가지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모두가 박사님의 소중한 증언 덕분입니다. …
홈페이지 어딘가에 오카모토 미노루의 사진을 올려놓았다는 글이 있던데 찾을 수가 없군요.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위의 이상유님 글을 요약하면
박정희 대통령의 창씨 명이 타카키 마사오(독립군을 비밀리에 도와준 사람으로 독립군사이에 유명) 와 오카모토 미노루(김상웅이 주장)라는 설이 있는데 있는데,
오카모토 미노루는 노무현 정권때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된 김삼웅이 박정희를 음해하려고 조작한 것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힌다. 사이비사학자에게 독립기념관장이란 중책을 누가 천거해서 누가 임명(누구긴 누구야... 김대중아냐?)했는지는 모르지만,
꼴두기가 어물전 망신시키는 꼴이군. 필자는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냈다:
"이상유님 보세요
혜서 잘 읽었습니다. 교육 동지를 만났군, 반갑습니다.
더욱 박정희 대통령의 참모습을 아시려고 주야 분투하신다니,
전교조 무리들이 많다는 곳이라 진흙 속에서 구슬을 만난 느낌입니다.
박정희군은 저의 죽마고우인지라,
그가 오카모토(岡本) 운운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이 없음을 잘 알고 있는데,
어느 엉터리 사학도가 그런 발설을 한 모양입니다.
오카모토라는 대구사범 교유는 광주학생사건 때 우리 조선인학생들을 때려잡아 수훈 갑인 자로서,
당시의 조선총독이 대구사범 학생감으로 특진시켰기에,
박군(박정희)이나 저를 포함한 우리 대구사범 조선인 학생들은 전원이 그를 개나 돼지처럼 악종으로 보았답니다.
그 사학자(김상웅-김대중 추종자), 그 자는 틀림없이 친북정권의 수하로서 박 대통령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그 악종의 성을 박군의 일본식 성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국민들의 박대통령에 대한 추모의 정을 말살 내지는 희석시키려는 음모의 발로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자서전을 쓰면서 그 오카모토 학생감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은 했지만,
모두가 교육자다운 모습은 없고, 시종일관 조선인 학생의 사상동향에서 민족정신을 뽑아,
독립운동의 씨를 말리려는 그의 더러운 수작을 폭로했을 뿐이었고,
귀하께서 말씀하신 그의 사진을 올린 기억은 없습니다.
여불비례
2008. 11. 13 울산 일산진에서 김병희""
실제로 병적과 서류를 모두 뒤져보면
박정희는 광복 때까지 '다카키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오카모토 미노루가 절대 아니라는 거죠.
6. 박정희는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을까
고산 고정일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박정희는 일본의 황국신민화 정책에 반발, 초등학교 교사직을 버렸습니다. 그에겐 무엇보다도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이란 근대적인 선진문화였습니다. 그즈음 선진문화 중 하나가 일본군사체제였기에 만주군관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적진 소굴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는 불을 훔치러 간 '프로메테우스 행보'입니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일제대륙침략선봉 황야의 늑대 이시하라 간지, 천황의 여우 기시 노부스케 두 걸물의 만주국건설 산업경제개발방략과 근대적 국가통략을 공부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니죠. 박정희는 당시 만주군으로 위장한 광복군 첩자였습니다.
뭔 헛소리냐고요? 잘 보세요.
7. 백강 조경한 선생이 말하는 박정희
자세한 설명은 이 짤로 대체합니다.
(아... 여기 오타가 났습니다. 조경환이 아니고 조경한입니다. 조경한 조경한!)
이래도 친일? 푸하하...
8. 백범 김구 선생이 말하는 박정희
박정희의 비밀요원 활동을 기록한, 육군본부의 창군전사 기록을 공개합니다.
http://www.donga.com/e-county/sssboard/board.php?no=379335&s_work=view&tcode=01001 가시면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스압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링크를 걸었습니다.)
김구 선생님과 조경한 선생님의 말이 구라라면
박정희는 광복 후 반민특위에 이름이 올라갔겠죠.
어떤 분이 백범 선생은 저런 글 쓴 적 없다고 하시던데,
글쎄요, 사실 저게 진위여부 논란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신 이걸 보여드리겠습니다.
김학규 장군 얘깁니다.
9. 박정희 독립군 토벌했나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 시절 팔로군을 공격한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팔로군은 어디까지나 중국 공산당의 군대일 뿐, 독립군이 아니죠.
사실, 일제 말에 독립군은 만주를 떠나
중국 내륙으로 다 이동한 상태였다고요.
실제로 류연산이라는 작자가 박정희 독립군 토벌설을 제시했다가
그렇다 합니다 ㅇㅇ
10. 독도 팔아넘겼나
대한민국에 귀화한 일본인으로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널리 알리고 계신 호사카 유지 교수의 말을 빌려 왔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호사카 교수의 '대한민국 독도'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외교문서 보니까 사실이 아니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박정희는 1965.6.22. 소위 구-한일어업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여기에서도 독도는 우리 땅이었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 당시 돈을 주는 대가로 일본이 또 독도를 거론했다는데요,
1965년 5월 17일, 미국 존슨 대통령은 방미중인 박정희를 만나 한일협정 진척을 축하하면서 독도를 일본과 공유하라, 공동등대를 설치하라 종용했습니다.
박정희는 이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미국이 힘으로 밀어붙이려 했지만(1965.6.15, 국무부문건 364호) 박정희는 장관급 회담을 거절하겠다며 맞섰습니다.
미국대사는 박정희는 그 무엇으로도 독도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며 밀어붙이기의 불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했다고 합니다.
독도는 1998년의 신한일어업협정에 의거 한일공동 어로수역의 중간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즉 우리의 국토인 바다가 국제법상 일본에게 영유권이 '인정'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1998년 11월 28일. 김대중 정권(당시 해양수산부장관은 노무현대통령입니다.)당시에 이뤄어 졌습니다.
그럼 김대중 대통령이 친일파입니까?
그리고 일본대중문화를 개방한 노무현 대통령도 친일파입니까?
11. 한일국교정상화
이제 여러분은
'아 닥쳐 광복 후에 친일했잖아 굴욕외교 한일국교정상화 모르냐?' 하겠죠.
글쎼요, 일단 이건 박정희 대통령이 잘못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
굴욕외교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충분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매국'이라고 몰아붙이기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본과 대일청구권문제의 타결을 위해 7차례나 회담, 우리가 요구하는 8억 달러와 일본이 제시하는 최고액 7000만달러중 무상으로 3억 달러, 차관 2억달러,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한일국교정상화를 타결합니다.
물론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돈 주는 쪽이 일본인데
국교정상화를 위해 돈을 많이 달라고 하면 일본이 해 줄까요?
(사실 저것도 그 당시로는 거금이었습니다만)
또한 위 금액은 보는 사람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집니다.
대일청구권? 저 돈이 적다고요?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를 받아내야 '잘 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요?
배상액이 아무리 많은들 일본이 우리를 유린한 댓가에 턱없이 적은 것이겠죠.
일본이 갖고 있는 돈을 다 줘도 모자랄 지도 모릅니다.
또한, 배상액 금액 과소 여부를 떠나
일본과의 악연을 일단 떨어버리고
국교정상화를 통해 일본과 보다 더 자유로운 경제교류를 가능하게 해서
대한민국은 결국 실질적 과실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죠.
법정 스님도 수필 '광복절에 생각한다'에서
일본이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일본은 일단 우리의 이웃이고,
또 우리보다 더 앞서 있어 배울 점이 많기 때문에
일본과 가깝게 지내서 나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과거사에 너무 집착해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화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셨고요...
그러면 법정 스님도 친일파겠네요.
그리고 대일청구권을 받은 나라가 있는지요?
수십억달러를 요구만 하고 받지 못하면 괜찮고
그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아 냈으면 친일파?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게 보상 못 받는 이유가 위의 대일청구권 때문이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당시 대일청구권을 받았기 때문에 현재 못 받는 것일까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정신대문제와 관련하여 대일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발표하였으며,
11월 국제법률가협회에서 일본의 배상의무가 있으며, 1965년 한일협정의 청구권에 불법인권침해와 위안부 개인의 권리침해에 관한 청구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특히 위안부문제에 관하여 한국, 타이완, 일본, 필리핀, 타이, 홍콩등 아시아 6개국 여성단체에서 공동보조를 취할 것을 결의하였습니다. 즉 일본으로부터 위안부문제로 보상받은 나라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만약 '위안부 문제 보상 못 받게 한 사람이 친일파'라면
김영삼 대통령이 친일파겠네요.
그리고 일본이랑 수교할 때 받은 돈 갖고 뭐했습니까?
미얀마, 태국 같은 나라들은 호텔이나 보트 짓고 놀고 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소 등을 만들어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초석을 닦았습니다.
그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쓴 거죠.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장면 정부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 그걸 할 만한 돈이 없어서 실패했죠.
스타크래프트 하시는 분들만 이해하시겠지만,
'SCV가 다 죽었는데 미네랄이 40밖에 없다'
뭐 이런 상황이었단 말입니다.
결국 외자의 도입이 필요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 외자의 도입을 위해
'민족의 미래를 위한 슬픈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마지막 할 말은 이 짤로 대체합니다.
자, 이제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모두 끝났습니다.
제가 제시한 증거들을 보고도
아직도 박정희가 친일파라고 생각하신다면
반박해 보시죠.
1. 박정희 대통령의 교사 시절 이야기는 전부 허구이며,
박정희 대통령의 제자들은 모두 박근혜한테 돈 먹은 알바라는 걸 증명하세요.
2. 어떠한 방식으로든 식민 정부에 조금이라도 협조하면 무조건 친일파이며,
그러니까 장제스 총통은 친일파, 이우 황자도 친일파, 나폴레옹은 친불파, 워싱턴 대통령은 친영파라는 것을 증명하세요.
3.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만주국을 제3국이 아닌 일본의 속국이라고 생각했고,
만주군도 일본 황군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세요.
4.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시한 박정희 친일 혈서가 진짜라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세요. 제가 제시한 증거 다 반박해야 합니다.
5.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창씨개명을 또 한 번 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세요.
6.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동기는
오로지 순수한 '대일본제국을 향한 충성심'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세요.
7. 백강 조경한 선생이 거짓말쟁이거나,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세요.
8. 백범 김구 선생과 김학규 장군이 거짓말쟁이거나,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세요.
9. 박정희가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보여 주세요.
10. 박정희가 독도를 지켰다고 주장하는 호사카 유지 교수가 거짓말쟁이이고,
박정희는 독도를 팔아넘겼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세요.
11. 한일국교정상화는 어떠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결코 미화될 수 없는,
을사조약에 버금가는 국치라는 것을 설명해 보세요.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박정희가 친일파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여러분이 직접 내려 주세요.
출처 : http://blog.naver.com/sangmin5886/16220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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