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소·돼지도 우리의 미래다

도일 남건욱 2013. 2. 13. 17:20

소·돼지도 우리의 미래다

김강식 한국육류유통수출입협회 고문
박정희 시절 ‘한우 혁명’ 이끈 노학자의 조언 … “투자·연구·관리 일원화 시급”


우리나라에서 한우를 국민의 먹을거리로 키우기 시작한 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7년) 기간부터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소는 농사 도구로 주로 쓰였다. 기계화가 농업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면서 소의 역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소를 식용으로 키우려는 움직임이 시작됐지만 문제점이 많았다. 일단 다른 나라 소에 비해 크기가 작고 체중이 적었다. 

1960년대 말 한우의 출생 때 체중은 24.6㎏으로 일본 화우(26㎏)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생후 90일이 지나면 한우(61㎏)와 화우(110㎏)의 체중 격차는 49㎏으로 벌어졌다. 출하 시점인 생후 500일이 되면 한우의 체중(210㎏)이 화우(500㎏)의 절반도 안 됐다.

“태어날 때는 차이가 거의 없는데 클수록 격차가 벌어지는 겁니다. 이유를 살펴봤더니 역시 먹는 것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잘 먹여 봐야 볏짚이나 소죽 정도가 전부였으니까요. 위가 발달하지 못했던 겁니다”

당시 농촌진흥청 농업연구관으로 일하던 김강식 한국육류유통수출입협회 고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 연구원들은 고급정보를 알려주지 않으려 했지만 그는 그런 일본인 사이에서 조수 역할을 하며 원인을 찾았다.

“품질 기준으로 따져 한우가 등급외 판정을 받던 시절이었습니다. 양과 질 어느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키우려면 영양분을 공급해 위를 발달 시킬 수 있는 사료가 필요했어요. 사람으로 치면 이유식같은 겁니다. 2년 반 동안 연구한 끝에 송아지에게 먹이는 인공유를 개발했죠”

소 이유식을 들고 돌아온 그는 인근 농가를 대상으로 실험에 나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2년 뒤 결과를 살펴보니 인공유를 먹인 소는 체중이 451㎏으로 늘었다. 소 한마리에서 출하할 수 있는 고기의 양도 99㎏에서 275㎏으로 증가했다. 8만4000원 수준이던 소 한 마리의 가격은 23만원대로 올랐다. 당시 그가 개발한 이 인공유는 ‘한우 혁명’으로 불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장을 직접 찾아 격려하고 훈장을 수여했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농촌진흥청 차장을 끝으로 1993년 관직을 떠났지만 이후 한국육류유통수출입협회를 설립하고 관련 연구를 계속해 왔다. 최근에는 돈가스·소시지 같은 돈육 가공품을 수출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잘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파는 것도 중요해졌다”며 “그러려면 가공 기술을 키우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축산업도 잘 키우면 부가가치가 충분한 만큼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농축산업을 쇠퇴한 산업, 경제성이 취약한 산업이라 말하지만 경제 논리로만 볼 게 아니라 국민의 먹거리라는 전략적 가치로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정보기술(IT)이나 과학기술 못지 않게 중요한 산업인 겁니다.” 새 정부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는 축산 전문 인력 육성이 시급하다고 봤다.

“평생을 축산업에 몸 담았지만 전문가 양성이 잘 안 됩니다. 그나마 몇 없는 전문인력마저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분야는 돼지·소·닭 등 저마다의 특성이 있는데 담당 공무원들은 한 군데서 2년 이상 머물지 않습니다. 물론 이들에게 한 분야에서만 계속 일하라고 강요할 순 없지요. 그러니 축산기술정책연구소(가칭)와 같은 기관을 만들어 투자와 연구·관리가 일원화할 수 있도록 정부가 체계를 잡아줘야 합니다.”

그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1시간 20분 거리를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0년은 거뜬합니다. 일도 남았고요. 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