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박사님이 읽은 책

여왕의 최고 행운은 필립공 배필 맞은 일

도일 남건욱 2013. 4. 26. 15:45

Business Book - 여왕의 최고 행운은 필립공 배필 맞은 일

『퀸 엘리자베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


‘재미·지혜·지식을 차고 넘치도록 담은 책’. 하지만 800쪽 분량의 책을 자발적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작가는 정말 대단하다. 처음 읽기 시작할 때 집중력을 끝까지 유지시키는 재주가 있으니 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여성 지도자로 꼽히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다룬 『퀸 엘리자베스』가 그렇다.

25세에 여왕에 올라 반세기가 넘게 영국인을 비롯한 세계인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었다면, 고수 중의 고수일 것이다. 바로 이런 인물이 퀸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작가는 여왕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건들을 마치 옆에서 보기라도 한 듯 생생하게 전한다. 실황 중계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중계에는 영국의 근·현대사가 배경음악처럼 흐르면서 여왕이 만난 전 세계 지도자들이 등장한다. 따라서 특정인물에 관한 자서전으로 읽기 시작했지만 그 속에 등장하는 정치가와 나라 이야기 속에서 현대사 공부를 제법 튼실하게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주목한 건 우선 인간 엘리자베스 2세에 관한 부분이다. 그는 여왕이란 공식적인 직책을 유지해 나가면서도 동시에 어머니이자 아내로 살아야 했다. 이런 묵직한 과제를 어떻게 척척 해결할 수 있었을까?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 행운이 함께 했다. 행운 가운데 으뜸은 결혼 초부터 여왕을 보필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부군의 자리를 꿰찬, 몰락 그리스 왕가의 왕자인 필립 공이다. 

72년 전에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저 남자를 선택하겠다’고 결정한게 엘리자베스 2세의 생애에 이처럼 큰 축복이 될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서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아내와 결혼하기 이전의 남편감들이 필독해야 할 대목이다. 

영광의 아내를 취하는 대신에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미션이라고 생각하는 남자라면 훌륭한 가정을 꾸려갈 수 있지 않겠는가? 필립 공의 출구는 자기 나름의 역할을 찾아 수십 년 동안에 무려 800개가 넘는 다양한 자선단체 후원자로 활동하는 것이었다.

여왕의 처신은 과하지 않고 그렇다고 부족하지 않은 절제와 겸손이 큰 축을 이룬다. 작가는 퀸 엘리자베스가 지킨 원칙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왕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비범해야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국민들은 그가 아주 평범하지 않더라도 인간적이어야한다고 기대한다. 국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여왕은 두 가지 면모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만약 여왕이 지나치게 신비롭고 멀게 느껴진다면 그는 국민들과 유대를 상실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보통 사람들과 같아 보인다면 독특한 신비감 역시 잃게 된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지도자라면 엘리자베스 2세의 처세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2세 역시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었다. 그의 기대와 달리 공무에 바쁜 어머니 탓에 가정의 공백은 의외로 컸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대한 전권은 아버지가 쥐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공백은 예상보다 컸다. 

그 역시 평범한 어머니처럼 자식들이 좋은 배우자를 만나 잘 살길 소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아이들이 실망감을 안기고 좌절시킬 때면 어김없이 입을 꾹 다물고 애견과 함께 산책길에 올랐다. 그런 방식으로 그는 평정심을 찾았다.

처칠과 퀸 엘리자베스 사이에 연령 차이는 50년이 넘었다. 그런데 그는 처칠로 하여금 손자뻘의 여왕을 존경하도록 만들었다. 이 또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가진 인간적인 매력과 노력의 결과물이다. 처칠이 죽음을 맞았을 때 선왕의 유언에 따라 최고의 예우를 다해 장례를 치르는 것을 보면서 누군가를 기념하는 정치의 참 모습을 엿볼수 있었다. 그가 맞은 세 번째 수상인 맥밀런은 “그의 아름답고 환하게 빛나는 눈매에 매료됐다”고 고백한다.

그는 설령 그와 맞서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친구로 만들어야 할 강력한 필요를 느낄 때면 어김없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진 모든 걸 동원했다. 때로는 그의 매력을 사용하는데도 인색하지 않았다. 독자들이라면 지금도 곱지만 젊은 날의 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사진을 보고 다들 한 마디 할 것이다. 아마도 멋진 표지 사진에 낚이는 사람도 제법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스물한 살 생일에 했던 맹세를 잊지 않았다. “나의 판단력이 설익었을 때인 풋내기 시절의 맹세가 있다. 그때 평생을 몸 바쳐 조국에 봉사하겠노라 다짐했다. 그걸 후회하지 않으며 그때 했던 단 한마디도 철회하지 않겠다.” 그가 아랫사람들을 다루는 기술도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한결 같이 여왕에 절대 충성을 받칠 수 있는가? 리더십의 교본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 책에서 마가렛 대처 시대의 영국 상황을 여왕의 입장에서 생생하게 조명해 볼 수 있다. 또한 죽음 이후에 추앙 받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는 이 책이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다고 본다. 서둔 결혼이 가져온 결과 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특히 찰스 황태자의 혼인을 결정하는 과정은 누구든지 중대 결정의 순간을 맞은 사람에게 교훈적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