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어제가 이순신 탄신 제 468주년이었습니다. 이번에 선을 보인 이순신 연구가 박종평 선생의 <흔들리는 마음, 이순신을 만나다>는 멋진 책입니다. 고향 바다에 있는 한산도의 제승당은 유년기에 자주 들러곤 하였던 곳이지요. 지금처럼 성역화 되기 이전의 단아한 모습의 제승당을 저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답니다. #1.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 “시작과 끝은 항상 같은 마음으로 해야 한다.” “신에게 전선이 아직도 12척이 있습니다. 죽을 힘으로 막아 지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 비록 전선은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2. 제갈공명이 쓴 <후출사표>와 이순신이 쓴 두 번째 출사표의 마지막 단락이 똑같다. 이순신이 <삼국지>를 읽고 제갈공명을 연구하고 닮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순신과 제갈공명의 삶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에는 신비로울 정도로 비슷하다. 각자의 운명을 예감한 뒤 하늘에 기도하는 모습, 한창 나이인 54세에 전쟁터에서 마감한 삶, 똑같은 충무공 시호, 그러나 제갈공명은 천재 전략가로 남았고, 이순신은 군신(軍神)이 되었다. #3. 이순신의 두 번째 출사표의 맨 마지막 문장에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죽음을 무릎쓰고 전쟁터로 떠날 수밖에 없음에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는 결의가 담겨 있다. “성공과 실패, 이익과 해로움이 어떨지 신은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문장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후출사표> 맨 마지막 문장이다. 이순신은 제갈공명처럼 항상 밤잠을 못 이루며 전쟁을 대비했다. 예상된 전쟁이 벌어지자, 담당하게 제갈공명의 <후출사표>를 인용하며 길을 떠나려고 한 것이다. #4. 이순신도 제갈공명처럼 신심을 갖고 모든 일에 성실하고 세심하게 일했다. 그는 진중에 있을 때 수면시간은 서너 시간에 불과했고, 새벽에도 사람들을 불러 의논을 했으며, 식사량도 매우 적었다. 이순신도 제갈공명처럼 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러나 식사량이 적었던 것은 제갈공명과 달리 군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굶주린 군사들과 함께 하기 위한 솔선수범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병에 걸려 신음했다. <난중일기>에는 “몸이 아프다. 진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등의 기록이 약 140회나 나올 정도다. #5. 제갈공명은 촛불이 꺼졌을 때 체념하면서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이순신은 젊어서부터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녹둔도 둔전관 재임 시 여진족의 침입에 대한 책임 문제로 이순신은 사형당할 위기를 맞았다. 그때 이순신의 동료 선거이가 위로하며 술이라도 한 잔 마시라고 하자 이순신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술을 마셔 무엇하오.”라며 담담하게 행동했다. #6. 삼도수군통제사였던 1597년에 선조가 내린 부산포 진격 명령을 거부한 죄로 파직당하고, 감옥에 갇혀 죽음의 위기를 맞았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죽게 되면 죽는 것이다.” (死生有命 死當死乎) #7.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어려 사람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기록이 나온다. 그 중 가장 많이 언급된 사람이 류성룡이다. 약 15회 정도다. “영의정의 편지도 가지고 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며 애쓰는 일을 들으니 감개함과 그리움이 어찌 다하랴.” (1594년 2월 12일) -출처: 박종평,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 흐름출판, p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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