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D 프린터 산업 육성책 발표
중국과 일본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중국은 지난해 10월 베이징에 3D 프린터 기술 산업 연맹을 세웠다. 산·학·연·관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산업표준을 빠르게 제정한다는 목표다.
중국 과학기술부는 올해 3D 프린터 기술을 ‘국가 연구발전 계획’에 포함했고 지방정부도 개발단지 조성에 뛰어들었다. 일본 정부는 속도·가격 경쟁력을 갖춘 3D 프린터 연구개발을 2018년까지 주도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우리 정부도 최근 3D 프린터가 가져올 다양한 파급효과에 주목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7월 8일 산·학·연·관이 모인 ‘3D 프린팅 산업 발전전략 포럼’ 발대식을 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전자 등 대기업과 벤처 3D 프린터 제조장비사가 참여해 발전 방안을 모색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9월까지 각계 의견을 모아 3D 프린터 산업 육성책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늦은 감이 있다. “3D 프린터를 처음 연구할 때 경제적 지원이 필요했지만 도움 받을 곳이 없었습니다. 벤처캐피털과 공공 보증기관까지 안 찾아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죠. 우리 기술을 증명하는 특허와 신기술인증을 다 가지고 있어도 문전박대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국내 한 관련업체 CEO의 말이다.
그는 “투자할 만한 중소기업의 기술력도 선입견으로 묻히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가 탁상공론에 그치지 말고 현장의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 목소리를 들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다른 CEO는 “보조금 지원은 기대하지도 않는다”며 “정부가 대기업 위주의 정책에서 벗어나(3D 프린터가) 중소기업과 1인 창조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 차원에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볼트나 베어링 같은 기계 요소들의 숫자와 원리를 알기 쉽게 소개하면 일반 창업자들이 3D 파일링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중소기업 현장을 잘 아는 중소기업진흥공단(이하 중진공) 같은 공공기관들은 정부 부처보다 빨리 3D 프린터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중진공 창업사관학교는 2001년 무렵부터 이미 산업용 3D 프린터를 도입했다. 중소 규모 업체를 운영하는 기업인이나 예비 창업자가 3D 프린터로 시제품을 출력할 수 있도록 지원(제작대행)하기 위해서다.
기업인인 경우 시중가의 60% 정도만 수수료를 내면 고가 3D 프린터를 쓸 수 있다. 한 달 평균 30~40건을 지원한다. 현재 SLA 방식의 일본산 ‘EQ-1’, FDM 방식의 미국산 ‘Fortus 900MC’, 잉크젯 방식의 이스라엘산 ‘Connex500’ 등 3대를 보유했다. 시중가로 5억원이 넘을 만큼 고가 장비다.
경기지방중소기업청(이하 경기중기청)도 지난해 5월 경기도 수원에 시‘ 제품 제작터’를 만들어 3D 프린터 3대를 도입했다. 중진공과 마찬가지 취지다. 박동철 경기중기청 연구원은 “정밀도가 높은 미국산·일본산 장비를 도입했다”며 “비용 부담이 커 엄두를 못 내던 예비 창업자 사이에서 반응이 좋다”고 말했다.
박 연구원에 따르면 이들은 제조업종 창업에 뛰어들었다가 중간에 포기하거나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3D 프린터로 출력하는 시제품은 이런 시행착오를 줄여주고 가능성이 있는 사업인지를 알기 쉽게 보여준다. 유석환 대표는 “컴퓨터 모니터로 볼 때와 3D로 출력한 시제품을 직접 보며 분석할 때 성과는 천지차이”라며 “대기업들이 비싼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산업용 3D 프린터를 도입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특허 분쟁 대비해야애로점도 있다. 기관들로선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고가 장비를 들였는데 막상 애프터서비스(AS) 비용 등 유지비가 많이 들어 고심이다. 중진공의 8억원짜리 프린터 한 대에 연간 3000만원의 AS 비용이 든다.
일본 등 제조사에서 직접 전문 인력이 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손본다. 이들 업체로서도 수요가 늘지 않은 한국 시장에 지사를 설립할 필요성이 적다.
그나마 중진공은 사정이 낫지만 연구·교재용으로 무작정 고가의 3D 프린터를 사들인 사립대학은 손실이 크다.
서울 시내 한 사립대 교직원은 “원료가 굳는 걸 염려해 전원을 마음대로 끌 수 없고 상온을 유지해줘야 하는 등 관리가 까다롭다”며 “5억~8억원 들여 프린터를 샀어도 정작 막대한 유지비가 부담돼 전시용으로나 방치하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결국 정밀도가 높은 고가 3D 프린터의 업무환경을 유지해주려면 많은 인력·비용 소모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다. 제품 가격까지는 감당했어도 매년 들어가는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활용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영환 중진공 팀장은 “유지비 문제는 아직 척박한 3D프린터 시장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며 “제품 가격이 낮아져 수요가 늘고 시장 환경이 개선돼야 유지비 문제가 개선되고 걸음마 단계인 국내 관련 업계의 발전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하나는 중소기업들의 특허보호 문제다. 3D 프린터 시장이 커질수록 국내외 제조사와 특허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진다. 암암리에 대기업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벤처 제조사 CEO는 “한 대기업으로부터 10억원에 우리 회사 특허권을 공동 소유하자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법적 분쟁이라도 생기면 중소기업으로선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특허법인 대아의 정병직 대표변리사는 “3D 프린터 시장이 팽창하면 특허 분쟁도 그만큼 증가할 수밖에 없다”며 “중소 규모 벤처기업들이 특허 보호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문제들이 있지만 국내 3D 프린터 시장이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춰 성장을 이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컨설팅 전문업체인 홀러스어소시에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47억 달러였던 3D 프린터 시장 규모는 2019년 138억 달러로 성장할 전망이다. 3D 프린터가 바꿀 산업환경은 무궁무진하다.
예컨대 지금까지는 인건비가 싼 중국에 신발 공급기지를 만들어 4시간 만에 본사까지 선적·포장해 날랐다면 앞으로는 디자인 파일만 있으면 복잡한 유통과정 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수송과 물류 개념이 지금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많은 기업들을 든든하게 하던 대량생산 원가가 3D 프린터로 제조했을 때 원가보다 높아지는 진풍경이 나올 수 있다.
차근차근 대비해야 할 문제도 생기지만 즐겁게 지켜볼 일도 많다. 최근 관련 기술의 발전은 전문가들도 놀랄 정도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올 들어 로켓엔진 연료 분사장치를 3D 프린터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우주로 향하는 매우 복잡한 부품마저 구현에 성공할 만큼 3D 프린터가 정밀해진 것이다.
타일런 힉맨 NASA 연구원은 “제작비가 가장 많이 드는 부품 중 하나마저 구현할 만큼 3D 프린터 기술이 발전했다”고 말했다. 제작 기간은 수년에서 4개월로 단축했다. 공상과학영화로나 꿈꾸던 ‘더 빠르고 정밀한’ 3D 세계 구현이 머지않았다.
프로슈머(Prosumer) 생산자(Produc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다. 소비자가 소비뿐 아니라 제품 개발과 유통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제3의 물결』에서 처음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