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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코인 논란으로 되짚은 화폐의 역사

도일 남건욱 2014. 1. 17. 15:34


Special Report - 시대 따라 바뀌고 시대를 바꾸기도
비트코인 논란으로 되짚은 화폐의 역사
신뢰 잃을 때마다 인플레이션 초래 … 미래 화폐도 신뢰 획득이 관건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가상화폐 ‘비트코인(bitcoin)’이 세계 금융시장의 화두로 떠올랐다. 이미 적지 않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비트코인으로 물건을 살 수 있다. 미국과 독일은 비트코인을 화폐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중국·프랑스·네덜란드는 다르다. 비트코인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한국도 비트코인을 화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쏠린다. 

그럼에도 비트코인을 둘러싼 논란과 관심은 더욱 커지고 있다. ‘새로운 화폐 개념이 출현한 만큼 적극적 관심이 필요하다’ ‘실체가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엇갈린다. 역사 속의 다른 화폐도 이런 논란 속에 통용됐을까? 시대를 바꾸고 시대에 따라 바뀐 화폐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봤다. *참고 자료: 『화폐이야기』 『경제의 핏줄 화폐』 『돈의 역사』 『화폐 그것을 알고싶다』


지갑 속의 1만원짜리 지폐를 꺼내보자. 세종대왕이 그려진 이 녹색 종이(정확히는 종이가 아니라 솜이 원료) 한 장을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은 70원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고민 없이 1만원으로 알고 쓴다. 화폐의 가치는 화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실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이런 물건에 믿음을 주고 가치를 부여했을까?

화폐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 길다. 6000년 전 농기구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먹고 생활하고 남을 만큼의 생산물이 발생하던 때다. 사람들은 이런 잉여 생산물을 다른 사람과 교환하기 시작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닭을 키워 돼지를 사고 싶다고 치자. 다행히 거래를 원하는 상대를 만나면 쉽게 교환할 수 있다. 

돼지 주인이 원하는 게 소라면 다르다. 거래는 이뤄지지 못한다. 이처럼 화폐가 없으면 자신과 반대의 거래를 원하는 상대가 있어야만 거래를 할 수 있다. 행여 운 좋게 맞는 거래 상대를 만나도 교환은 순조롭지 않다. 나는 닭 10마리와 돼지 1마리를 바꾸고 싶은데, 돼지 주인은 닭 30마리를 원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불일치 문제를 해결할 제3의 물건을 고안했다. 바로 화폐다. 먼저 물건을 교환하면서 자연스럽게 물건 사이의 가치를 비교했다. 이때 비교 기준으로 자주 사용하는 게 생겼고, 이게 자연스레 화폐 역할을 담당했다. 돼지를 원하는 닭 주인이 닭과 쌀로 바꿔 돼지 주인에게 준다. 돼지 주인은 받은 쌀로 소를 산다. 

이 경우 ‘쌀’이 화폐의 기능을 한 셈이다.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가 많이 나는 남아메리카에서는 카카오 열매를, 소금이 풍부한 아프리카와 지중해 지역에서는 소금을, 농경 지역에서는 곡식과 옷감을, 가죽이 재산이었던 유목민은 동물을 각각 돈으로 썼다.

더 튼튼하게, 더 작게

이렇게 ‘가치의 기준’과 ‘거래의 수단’으로 돈의 역할을 대신 하는 물건을 ‘상품화폐’라고 한다. 처음에는 곡물·가죽·옷감 등 생필품이 상품화폐로 많이 쓰였다. 그러다 점차 보관과 운반이 용이한 동물의 뼈나 장신구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화폐에 가치의 기준과 거래의 수단이라는 기능 외에 보‘ 관과 축적’이라는 역할이 더 해지면서다. 무겁고 부피가 크면 들고 다니며 거래하거나 집에 쌓아두기 불편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게 조개껍데기다. 중동·중국 등에서 기원전 수천 년 전부터 사용했다.

이처럼 생필품에서 장식품으로의 전환은 화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됐다. 『화폐이야기』에서는 ‘생필품에서 장식품으로의 전환은 화폐의 가치가 그 내재적 가치(화폐를 구성하는 소재의 가치)에서 이탈하는 단초’가 됐고 ‘이후 화폐의 역사는 내재적 가치에서 멀어지는 기나긴 여정’이라고 설명한다. 조개껍데기는 70원짜리 종이가 1만원으로 쓰이게 된 발상의 시작인 셈이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아직 긴 여정이 남았다. 사람들은 더 작고 더 튼튼한 돈을 원했다.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며 낙점된 게 금속이다. ‘금속 화폐는 적은 양으로도 고유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는 내구성이 뛰어나고 보관과 휴대 및 운반이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다. 

아울러 금속은 필요한 규모에 따라 나누고 표준화시키기 쉬우며, 필요할 때 다시 한 데 모아 용해시킬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이와 함께 금속 화폐는 동일한 무게가 같은 가치를 보유해서 질적 동일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상품 화폐보다 우월했다’(『화폐이야기』) .

처음에는 주로 청동과 철로 돈을 만들었다. 구리로 만든 쟁기(포전)와 철로 만든 칼(도전)이 이때 등장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금속 화폐 시대를 연 것은 금과 은이다. 금과 은은 앞에서 말한 금속 화폐의 장점뿐 아니라 매장량이 적어 수급 변동이 크지 않고 희소가치를 지녔다. 

물질적 특성 외에도 사회·종교적 상징성을 갖춘 점도 화폐로 채택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쉽게 녹이 슬거나 변하지도 않고, 보기 좋게 반짝이기까지 한다. 화폐로서 더 할 나위 없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무게를 재야 하는 번거로움이다.

금과 은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쓰이진 않았다. 초기에는 뭉텅뭉텅 잘라서 사용했다. 그러나 금속 화폐는 순도와 무게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다. 이를 ‘칭량화폐’라고 한다. 무게를 재서 가치를 정한다는 뜻이다. 영국의 화폐 단위 ‘파운드’나 과거 유럽 국가들의 화폐 이름이었던 마르크(독일)·리브르(프랑스)·리라(이탈리아) 등은 금·은의 무게를 재던 시절의 흔적이다.

저울로 일일이 무게를 재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사람들은 금과 은의 크기와 모양을 조금씩 맞춰갔다. 그게 바로 막대 형태의 괴(塊, bar)다. 여기에 일정한 무게와 순도를 인증하는 인장(stamp)를 찍었다. 그러나 여전히 위조하기 쉽다는 단점이 있었다. 사람들은 기어이 작고 같은 모양·무게를 가진 금과 은 덩어리를 만들어냈다. 동전이 등장한 것이다.

동전 형태 금·은화 2500년 전 터키에서

2500년 전 지금의 터키 지방인 리디아에서 세계 최초로 오늘날의 동전과 같은 동그란 형태의 금·은화를 만들었다. 호박금(electrum)이라 불리는 동전이다. 이를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널리 퍼뜨렸다. 무역 용도뿐 아니라 동전을 만들어 수익을 남기는 ‘주조 차익’을 얻거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규모로 화폐를 주조했다. 국가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만든 시초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이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면서 전리품인 금과 은으로 통일된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다. 화폐량의 증가와 화폐의 보편적 사용으로 교역이 늘고 경제적 번영과 통합의 기반이 됐다. 하지만 화폐의 급격한 증가로 화폐 가치가 떨어지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이어 로마 제국이 그리스가 만든 ‘정복 후 화폐 발행’의 바통을 이어 받았다. 

특히 초기 로마는 대외팽창 정책 덕에 정복지에서 지속적으로 금·은을 공급 받았다. 화폐 발행도 증가했다. 다만 이 때는 교역도 크게 늘어나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진 않았다. 그러다 1세기가 넘어가면서 금·은이 부족해졌다. 영토 확장이 중단되고, 식민지였던 스페인의 금·은 광산도 바닥을 드러내면서다.

통치를 위한 재원이 필요했던 로마 황제 네로는 금·은화의 순도를 줄이거나 도금된 화폐를 만들어 재원을 충당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폐 가치는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시중에 유통되는 진짜 금·은화도 줄었다. 금화를 화폐로 쓰기보다 그걸 녹여 금을 만들어 파는 게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를 기점으로 화폐는 암흑기를 맞는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화폐를 발행할 만한 중앙 권력이 사라졌다. 중세의 ‘충성과 보호의 약속’ 중심의 봉건제도, 농지와 수확물을 노동의 대가로 지불하는 장원제도의 특징은 화폐의 침체를 부추겼다. 재화의 거래와 부의 축적이 없으면 화폐는 무용지물이다. 이 시기 거래와 축적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이로 인해 금화 주조는 중단되고, 그나마 유통되는 은화의 순도도 점점 낮아졌다.

잠깐 동양으로 시선을 돌려 보자. 서양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화폐로서의 금이 발달하지 않았다. 금 매장량이 많지 않아서다. 대신 구리 동전이 쓰였다. 이 동전도 서양보다 약 500년 늦게 등장했다. 최초의 동전은 진시황제의 ‘원형방공전’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동전은 고려 성종(996년) 때 만들어진 ‘건원중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를 때까지 우리나라에서 동전은 널리 쓰이지 않았다. 대신 곡식과 옷감을 화폐 용도로 썼다. 상품화폐의 시대가 오래 지속된 셈이다. 관리들의 녹봉도 이것으로 지급됐다. 세종대왕이 화폐 대중화를 추진했지만 반발만 사기도 했다. 사농공상의 법도에 따라 상거래나 무역이 활발하지 못했던 탓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 후에야 경제체제 변화로 화폐가 통용됐다.

화폐는 거래를 위한 도구다. 거래 자체가 없으면 화폐의 쓰임새도 줄어든다. 반대로 상거래가 활발해지면 화폐는 빛을 발한다. 유럽에서 금화가 다시 고개를 든 건 14세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를 중심으로 무역이 발달하면서다. 이로 인해 유통되는 금화의 양과 종류가 늘었다. 원활한 무역 거래를 위해 서로 다른 금화의 가치를 평가할 전문가가 필요했고 ‘금 세공인’들이 이 역할을 맡았다. 이들을 잘 기억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