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9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시장의 예상을 깨고 전격적으로 콜금리를 올렸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한국에 전염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장담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도 같은 날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국내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프랑스 최대 은행 BNP파리바가 서브프라임 관련 펀드의 환매를 중단했고, 이튿날 코스피는 1900선이 무너졌다.
8월 13일 재정경제부 차관 주재로 금융정책협의회가 열렸다. 별다른 대책을 발표하지 않았다. 김석동 재경부 차관은 “정책적 대응책을 내놓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 우리는 외환위기에도 대처한 노하우가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시장은 정부의 장담을 미더워하지 않았다. 광복절에 쉰 주식시장은 8월 16일 개장과 함께 폭락했다. 코스피는 1700선, 코스닥은 700선이 깨지고 말았다.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주요 국가 중앙은행들은 대규모 자금 살포에 나섰다. 미국이 뿌린 자금은 9·11 테러 당시보다 많다. 과거 중앙은행의 대규모 시장 개입은 ‘뱅크 런(Bank Run)’ 우려 때문이었다. 은행이 부실 조짐을 보이면 서로 먼저 돈을 빼내려고 은행으로 달려가면서 나타나는 금융 패닉(공황)을 막기 위해서다.
금융 환경이 달라진 지금은 ‘펀드 런(Fund Run)’이 문제다. 투자자들이 펀드 부실을 우려해 먼저 환매하겠다고 달려가면 뱅크 런 못지않은 금융 패닉이 나타날 수 있다. 세계적으로 펀드는 예금을 뛰어넘어 거대 시장을 형성했다. 2000년 2조 달러였던 파생금융상품 시장은 지난해 200조 달러로 불어났다.
세계는 이미 펀드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 한국도 1가구 1펀드 시대다. 펀드계좌가 1500만 개를 넘는다. 코스피가 2000을 향해 달릴 때 하루 평균 3000억원이 넘는 자금이 펀드로 몰렸다. 이게 흔들리면 시장은 큰 소용돌이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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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액 적으니 안심하라고?미국과 유럽 등이 바삐 움직이는 데도 한국 정부는 앵무새처럼 “국내 시장에 큰 영향은 없다”며 시장 달래기로 일관했다. 국내 금융회사의 서브프라임 투자액이 적다는 게 그 판단 근거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 관료들이 입버릇처럼 강조했던 ‘펀더멘털 건재론’을 연상케 한다. ‘경제의 기초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가 결국 외환위기를 맞았다.
외국인 투자자들은 8월 8일 2차 남북 정상회담 발표 이튿날 딱 하루만 545억원 규모의 순매수를 보였을 뿐 7월 13일부터 내리 주식을 내다 팔았다. 특히 서브프라임 사태의 진앙지인 베어스턴스의 파산 소식이 전해진 7월 27일 외국인은 당시로선 사상 최대인 8447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코스피가 사상 최대의 낙폭을 기록한 8월 16일 검은 목요일에는 1조원도 넘게 순매도함으로써 종전 기록을 갈아치웠다.
2004년 4월 시가총액의 44.1%로 최고치를 기록한 외국인 지분율은 그동안 지속적인 순매도 공세로 33%대로 낮아졌다. 하지만 시장의 개방 정도는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상위권이다. 미국과 유럽계 자금이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한국 등 신흥시장에서 계속 빠져나가면 문제가 커질 수 있다. 파생상품은 서로 복잡하게 엉켜 있어 반드시 서브프라임에 직접 투자한 경우만 피해를 보는 것도 아니다.
서브프라임 부실이 표면화한 7월 27일 이전만 해도 외국인들은 한국물의 주가가 크게 오른 상황에서 차익을 실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브프라임 사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뒤에는 서브프라임 부실에 따른 손실을 보전하거나 보다 안전한 쪽으로 옮기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
지금까진 외국인의 순매도 공세가 계속돼도 개인과 주식형 펀드 자금으로 무장한 기관들이 받아 먹으며 주가 하락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외국인의 순매도가 그치지 않으면, 특히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빠지면 개인이고 기관이고 매도 물량 소화에 한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외국인은 이미 최근 한 달 사이 10조원이 넘는 순매도를 보였다.
서브프라임 사태는 증시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계속 떨어지던 환율이 오르기 시작했고, 기업들의 해외자금 조달도 힘들어진다. 벌써부터 외국계 은행들이 시장에서 안전 자산인 달러를 사들이면서 달러 부족 현상을 빚고 있다. 그 바람에 8월 17일 원-달러 환율은 다섯 달 만에 950원대로 진입했다.
원-엔 환율도 엔캐리 트레이드(저금리의 엔화로 돈을 빌려 고금리 통화에 투자하는 자금)의 청산을 예고하듯 16·17일 이틀 동안 100엔당 53.5원이나 올라 849.9원으로 치솟았다. 말 그대로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게다가 아직은 그리 동요하지 않는 국내 개인투자자들이 추락하는 증시를 다시 외면하며 펀드환매 사태에 돌입하면 시장은 걷잡기 힘든 상황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코스피지수 1600선마저 무너지면 “시장이 불안할 땐 역시 현금이 최고”라며 펀드 런으로 몰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두 달 연속 콜금리 인상도 잘못콜금리도 올리려면 진즉 올려야 했다. 유동성이 급증하고 집값이 뛸 때는 딴전을 피우다 이제 와서 유동성을 흡수한다며 잇달아 금리를 올린 것은 정부가 늘 강조하는 선제적 대응이 아닌 뒷북정책의 전형이다. 다른 나라에선 서브프라임 사태를 의식해 유동성을 대거 공급하는 판인데 한국만 사상 처음 7·8월 두 달 연속 콜금리를 올렸다. 서브프라임 투자액이 적다는 이유로 자만에 빠진 건가? 국제 금융환경의 흐름과 변화를 읽는 능력이 부족한 것인가?
어쨌든 그 이튿날부터 국내 증시도 서브프라임 부실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면서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8월 7일 기준금리를 동결했던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17일 결국 재할인율을 6.25%에서 5.75%로 0.5%포인트 전격 인하했다
더구나 권오규 부총리는 8월 14일 재경부 직원 게시판에 “엔캐리 트레이드가 빠르게 회수될 경우 제2의 외환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부총리로선 직원들에게 경각심을 주려는 의도였을 게다. 하지만 이게 알려지자 시장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동안 공식 석상에서 “경기가 회복 국면에 접어들었다”며 낙관론을 펴온 그의 내부 발언이라서 더욱 그랬다. 그동안 외국인의 집중 매도 속에서도 3조원이 넘는 주식을 사들이며 버텨온 개인들이 이날은 7000억원어치를 내다 팔았다. 뒤늦게 두 차관이 해명성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은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에 휩싸였다.
지금 세계는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한 신용경색 경보 체제에 들어가 있다. 미국 헤지펀드뿐만 아니라 유럽 은행들도 손실을 고백했다. BNP파리바의 펀드환매 중단 이후 유럽중앙은행이 긴급 수혈한 자금이 우리나라 1년 예산보다 많다. 서브프라임과 관련 없는 기업들이 자금 조달에 차질을 빚는 ‘나비효과’까지 빚어지고 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번질지 예측하기 어렵다.
결국 최근 5~6년 사이 지속된 ‘유동성 잔치’는 막을 내리는 모습이다. 대신 고금리 시대로 접어들면서 그동안 초저금리 상황에서 잠복했던 문제가 불거지는 간단치 않은 구조다. 글로벌 실물경제가 탄탄하다지만 신용경색이 장기화하고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지면 결국 실물경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지금은 서브프라임 신용경색 우기(雨期)다. 개인들은 교과서대로 투자를 냉정하고 차분하게 해야 한다. 비가 계속 내릴 때는 우산을 준비하고, 집중호우가 내리면 외출도 삼가는 게 좋다. 소나기가 내리는 데도 무시한 채 산에 오르다간 벼락을 맞을지도 모른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세계 증시는 끝없이 오르는 줄 알았다. 다들 상승 장세에 취해 악재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망의 2000고지를 넘어섰던 코스피가 속절없이 추락하는 판에 막연히 “괜찮다” “안심하라”는 의례적인 말이 통할까? 호들갑을 떨어도 곤란하지만 적절한 선제적 대응책은 필요하다. 대중심리는 전염병과 비슷하고, 호재보다 악재에 더욱 빨리 전염된다. 정책 당국은 전염의 매개를 차단할 만한 믿음을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