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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살 빼야 살아남는다기업도 가계도

도일 남건욱 2008. 11. 8. 13:03
군살 빼야 살아남는다
기업도 가계도
소득 중단 등 최악 상황 대비 … 돈 나가는 구멍 모두 재점검할 때
어려움과 맞닥뜨리면 적극적으로 맞서기를 피하는 본성이 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현실도피라고 한다. 그동안 ‘나는 괜찮겠지’라며 경제위기 앞에 딱히 근거 없는 자신감을 보였다면 현실도피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보자. 복잡한 지표들과 바다 건너 낯선 회사들의 몰락은 내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결국 내 생활과 끈이 닿아 있다. 그 끈을 당기면 앞으로 넘어지고, 버티는데 끈을 갑자기 놓으면 뒤로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우리가 마냥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는 이유다. 기존의 생활 패턴대로 살거나 자산을 재점검하지 않고 방치하다간 언제 폭풍 속 낙엽 신세가 될지 모른다. 위기가 증폭되는 뉴스에 놀라기보다 차분히 내 재산은 안전한지, 거품을 뺄 곳은 없는지, 소득이 끊길 때를 대비한 비상금은 조달할 수 있는지 살펴볼 때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주부 Y씨(31)는 얼마 전 사촌언니에게 느닷없는 전화를 받았다. ‘다음달 월급 나오면 바로 갚을 테니 180만원만 빌려 달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Y씨는 “우선 급한 대로 30만원 정도 만들어서 보내줬지만 무슨 영문인지 당시에는 몰랐다”고 말했다. 며칠 뒤 Y씨는 돈을 빌려간 사촌언니로부터 ‘카드사의 현금서비스 한도가 줄어들었다’는 말을 들었다.

서울 용산구에서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 L씨는 얼마 전 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동안 대출한도 1500만원에 연리 8.7%에 쓰고 있던 마이너스 통장 금리가 11월부터는 11.5%로 오른다는 통보였다.

회사로부터 보조 받는 각종 경비도 깎이고 주식, 펀드도 손실이 난 판에 마이너스 통장 금리까지 오르는 상황이 됐다. L씨는 “지금은 한도를 꽉 채우진 않지만 앞으론 돈이 점점 더 들어갈 텐데 금리가 올라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아직까지 대출한도 축소나 만기연장 거부 같은 극단적인 상황은 없지만 이미 시중은행과 저축은행 등은 금리 인상 등을 통해 가계 대출을 억제하고 있다. 은행으로선 돈이 부족해 고금리 예금을 끌어들인 결과지만 은행 돈을 쓰는 개인이나 기업은 대출 금리 인상에 속수무책인 셈이다.

특히 여유자금이 별로 없이 매달 들어오는 수입에 맞춰 생활하는 사람들이나 마이너스 통장, 신용대출, 주택담보 대출 등 대출금이 많은 가계는 이자 상환이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직장인 K씨는 “몇 달 새 마이너스 대출, 주택담보 대출 등의 이자가 월 13만원이나 올랐다”고 했다. 그는 “일단 내 용돈을 줄여 이자를 감당하고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지난 1년여 동안 언론에 ‘세계 경제 위기’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제 위기는 나와 떨어진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세계적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망하고,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동안 으스댔던 미국 경제의 추락을 일부나마 즐기는 마음도 있었다.

부잣집 불구경이 재미있는 것과 마찬가지 심리다. 그런데 그 불똥이 이제 한국에 튀고 있다. 폭락한 주가, 급등한 환율, 꽉 막힌 수출에서 시작해 내수침체, 고용악화 등 우리 생활에 주름을 가게 할 악재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 세계 금융 위기가 가계 금융, 기업 경영 위기로 이어지는 셈이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해 ‘극약처방’을 계속하고 있다. 지난 10월 19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내놨지만 5일 후 코스피지수는 보란 듯이 심리 지지선인 1000포인트를 깨뜨렸다. 다행히 10월 30일 새벽 발표한 미국과의 통화 스와프 체결은 환율과 주가지수를 반전시키며 약효를 발휘하고 있지만 이번 처방이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할지, 일시적인 진통제일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

 


물가 상승과 임금 삭감으로 가계 실질소득은 점점 줄고 있다.

불확실성 시대 ‘비상금’ 준비해야


불확실한 금융환경과 장기불황이 예고되는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개인이든 기업이든 군살을 빼고 실탄을 확보해야 한다. 어느 순간 채권자가 ‘빚을 갚으라’고 할지 모르고, 갑자기 수입(매출)이 확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줄기만 하면 괜찮지만 회사에서 잘려 수입이 완전히 끊길 수도 있다. 많은 가구가 외환위기 이후 힘들게 이뤄놓은 자산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평생 일해 마련한 아파트 값은 뚝뚝 떨어지고, 펀드·주식 등 여기저기 투자한 자산은 주가 추락으로 처참한 결과만 남겼다.

여기까지는 이미 진행된 상황이다. 앞으로 대출금리가 계속 오르면 아파트를 살 때 빌린 대출 이자 부담은 점점 커지고, 회사 실적은 악화돼 임금이 줄어들 것이다. 물가상승으로 실질소득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갚을 돈은 늘어나고 손에 쥐는 돈은 줄어드는 형국이다.

생계를 위해 새로 대출을 받으려고 해도 전반적인 글로벌 자금 경색으로 쉽지 않다. 최악의 경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채시장까지 발을 들일 수도 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실직’이다.

은행, 대기업 직원들은 구조조정 바람이 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중소기업 직원들은 회사가 문을 닫아 당장 수입원이 끊길까 발을 구르고 있다. 외환위기 때도 대기업, 중견기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20~30%의 감봉과 감원 한파가 불었고, 이미 많은 금융회사가 연봉 삭감안을 발표했다.

기업 실적이 곤두박질치고 소비 심리가 얼어붙으면 자영업자도 영향을 받게 된다. 50대 C씨는 올해 초 퇴직금 2억5000만원을 해물전문점 창업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해일처럼 밀려오는 경기 침체를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장사가 되지 않아 임대료도 못 내고 있다가 얼마 전 문을 닫았다.

C씨는 “가게를 넘겨받겠다는 이가 없어 권리금도 포기하고 매장 문을 닫았다”며 “몇 달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믿지 못하겠다”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 일한 C씨에게 남은 것은 집 한 채가 전부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이미 중소기업 위주로 유동성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직원들의 임금을 10% 줄이기로 한 중소기업에서는 오히려 직원들이 사장에게 고마워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회사 사정으로 보면 문을 닫아야 마땅한데 직원들의 밥벌이를 끝내 등지지 않은 사장에 대한 고마움이다. 월급이 깎이더라도 실업자가 되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10월 30일 C&그룹이 워크아웃을 검토한다는 공시를 올렸고, 그 외에도 인수합병 강자로 알려져 온 몇몇 대기업에 대한 비관적 전망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한 외환 전문가는 “며칠 전 조찬 모임에 참석했는데 대기업 CEO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환율 전망을 물어봤다”고 말했다. 그는 “달러를 가진 기업은 내놓는 순간 다 잃는 것 아니냐는 우려 때문에 불안해 하고, 없는 기업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며 심각했던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글로벌 경제위기를 ‘1928년 대공황’ 이후 최악이라고 평가한다.

미국, 일본, 독일 선진3국이 동시에 불황을 겪는 것은 대공황 이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외환위기보다 더 무서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기 침체가 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지속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종우 HMC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외환위기 때는 뭐가 뭔지 몰랐기 때문에 당하고 나서야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며 “현재 가계 상황은 외환위기 때와 다르지 않다”고 분석했다.

이런 때 500만원은 평화로운 시기의 5000만원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비상금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장 쓸 돈도 없는데 어떻게 비상금을 만들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가계든 기업이든 이제는 꼭 필요한 자산이나 지출을 제외하곤 줄일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부채를 줄이고 가계 규모를 축소(downsizing)하라는 것이다.

그동안 넣고 있던 저축이나 보험, 각종 금융 상품은 적절한 것인지, 빚을 내 산 집은 나에게 맞는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때다. 부동산, 현금, 예금, 주식, 펀드, 보험뿐 아니라 자동차, 귀금속, 가전제품까지 환금성 있는 재산이라면 현재 기준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앞으로 가치가 어떻게 달라질지 재점검해봐야 한다.

주말이면 으레 외식하고, 남들 따라 했던 취미생활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사교육비에 지나치게 돈을 많이 쓰고 있다면 ‘이건 절대 못 줄인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항목은 없는지 꼼꼼히 따져보도록 한다. 돈이 새는 모든 구멍을 재점검해보라는 것이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과도한 차입경영으로 부채비율이 지나치게 높은 것은 아닌지, 겉으로만 ‘내실’을 부르짖은 것은 아닌지 재무 상태부터 인력 구조까지 경쟁력을 재점검하라고 컨설턴트들은 제안한다. 시장의 판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외환위기 당시 SK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냈던 유승렬 벤처솔루션스 사장은 “불필요한 지출은 평소에 줄이는 것이고 위기 때는 필요한 지출도 줄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