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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파 뛰어넘는 거국 경제팀 만들라”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

도일 남건욱 2008. 11. 12. 19:43
“정파 뛰어넘는 거국 경제팀 만들라”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
수익률 급급한 은행들 정신 차려야 … 새로운 금융체제 시대 맞을 준비 필요
두 원로가 한국 경제에 주는 충고
■ 실물경기 불황 10년 동안 계속될 수도
■ 새로운 금융체제 대비, 치밀한 계획 세워야
■ 외환위기 때 경험과 지혜 모으는 작업 필요
■ 야권의 발목잡기 식 정쟁 용납해선 안 돼
■ 은행들이 건전성은 뒷전이고 몸집 키우기만

한국 경제에 비상등이 켜졌다. 98년 외환위기 때보다 ‘살기 어렵다’는 한탄이 곳곳에서 들린다. 두 차례 통화개혁(53년, 61년)을 이끌었고, 국제통화기금(IMF) 가입(54년)을 성사시킨 ‘한국 경제의 산 증인’ 김정렴(84)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청담동 자택에서 만났다.

김 전 실장은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선 말을 아끼겠다”는 전제를 단 후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손수 작성한 메모 8장을 남겼다. 한국 경제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숙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무거운 느낌의 메모들이었다. 그가 전한 메모들과 1시간 30분의 인터뷰를 엮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가 심각합니다. 현재 상황을 진단하신다면?
“세계는 지금 금융 패닉 상태입니다. 금융위기가 수습되고 있다고 하지만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실물경기 침체입니다. 몇 년 안에 실물경기 불황이 끝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선 10년 동안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11월 15일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G20(선진 및 신흥 20개국)회의에서 금융위기 극복 방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각국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 계획을 합의하는 것조차 어려울 전망입니다. 그렇다면 실물경기 불황의 늪은 더욱 깊어질 것으로 우려됩니다.”

-1929~30년 세계 대공항보다 어려워질 수 있다는 의견도 많은데요.
“그때보다 피해 범위가 넓고, 기간은 장기화할 것으로 보입니다. 1944년 이후 세계경제의 양 축은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IBRD)이었습니다. 각국의 경제위기는 이들의 힘으로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릅니다. 미국발 금융독감의 전염경로는 세계적입니다. 두 기관의 힘으로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반대로 보면 이는 새로운 금융체제가 열릴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은 1944년 열린 ‘브레턴우즈 회의’(미국 뉴햄프셔주의 Bretton Woods에서 개최된 국제 통화 금융 정책 회의)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이 글로벌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기를 ‘브레턴우즈 체제’라고 부른다.

브레턴우즈 체제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국가는 단연 미국이다. 하지만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전염시키고 있는 지금, 이 체제는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다. 유럽연합(EU)과 신흥국들은 ‘신(新)브레턴우즈 체제’를 열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 중심의 경제체제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김 전 실장이 G20회의 결과에 주목하는 이유도, 한국 경제가 새 시대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G20회의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제안으로 성사됐다. 오바마 당선자는 옵서버 형식으로 이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 자리에서 오바마 당선자의 경제 구상이 어느 정도 드러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은…
한국 경제 60년의 산 증인
김정렴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한국 경제의 산 증인이다. 제1차, 제2차 통화개혁을 직접 기안했고, 1954년 우리나라의 국제통화기금(IMF) 가입을 성사시켰다. 1960년 수출주도 성장전략을 입안했을 뿐 아니라 70년대 진행된 중화학공업화 기반을 닦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한 후 1980년 주일대사를 그만둘 때까지 34년간 중앙은행과 정부에서 근무했다. 1950년 한국은행법 제정작업 보조요원으로 참여했고, 1953년 제1차 통화개혁의 전문을 기안했다. 그의 나이 29세 때의 일이다. 이후 김 전 실장은 우리나라 주요 경제정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다.

35세 나이로 재무부 이재국장 자리에 올랐고 그로부터 3년 뒤 재무부 차관으로 발탁됐다. 64년 상공부 차관을 거쳐 42세 때 재무부 장관에 기용됐다. 67년에는 상공부 장관까지 거쳤다. 정부 요직을 두루 섭렵한 셈이다. 김 전 실장은 특히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1969~1978년, 9년3개월)으로 명성이 높다.

세계은행은 글로벌 경제위기 못 잡을 것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정부는 물론 가계, 기업 모두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합니다. 장기 불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럽연합과 중국 등 신흥국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금융체제가 개막될 것에 대비,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국제적 공조에 적극 협력하고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최근 대한상의 회장단이 “투자와 소비 등 내수가 부진해지고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수출마저 위축되고 있다”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실물경제를 잘 알고, 위기 관리에 능통한 사람이 경제팀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제팀 교체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한국 경제에 필요한 것은 경험입니다. 우리는 제1, 2차 오일쇼크, 외환위기 등 수많은 경제위기를 잘 극복해낸 경험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능력 있고, 경험 많은 경제 실무자도 많습니다. 이들의 경험과 지혜를 하나로 모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경제팀 교체를 운운할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경험과 지혜를 하나로 모은다”는 것은 다소 원론적으로 들립니다.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면?
“여야, 이념, 정파를 떠나 능력 있고 경험 많은 경제 전문가가 참여할 수 있는 ‘거국적 경제팀’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형식도, 타이틀도 필요 없습니다. 청와대 경제 특별보좌관이면 어떻고, 자문위원이면 또 어떻습니까?”

김 전 실장의 주장은 ‘IMF 극복 주역의 중용론’과 궤를 함께 한다. 정치권에선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 김용환 전 자민련 부총재 등의 경험과 경륜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이 전 금감위원장은 외환위기 당시 투신사의 ‘펀드 런’으로 시장이 마비됐을 때, 유동화 회사보증(CBO·기업이 발행한 회사채를 담보로 주관사가 증권을 발행하는 것)을 도입해 시장을 설득하고 안정시켰다.

김 전 부총재는 ‘한국에 돈을 빌려주면 원금도 건지기 어렵다’는 국제 금융기관의 불신을 수차례 설득을 통해 불식시킴으로써 외채 협상을 이끌어낸 주역으로 꼽힌다.

거국 경제팀은 형식도, 타이틀도 필요 없어

-거국 경제팀 구성은 좋은 대안일 수 있지만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또 다른 정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비상시국입니다. 세계 경제의 마에스트로로 불렸던 미국 앨런 그린스펀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100년 만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금융공항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위기는 현 정권을 지나 다음 정권까지 계속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요즘 정치권 특히 야권의 태도는 도통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정부의 위기극복 정책에 시종일관 조건을 다는 등 정치적 포석 두는 데 급급한 모양새입니다. 정치적 입지를 노린 야권의 발목잡기 식 정쟁은 이제 용납해서도, 용인해서도 안 됩니다.”

야권은 지난 10월 중순 ‘은행채무지급 보증 동의안 처리’를 수십여 일 지체했다가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 동의안의 골자는 정부가 외환시장과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18개 시중은행이 내년 6월 말까지 차입하는 외화표시 채무의 원리금 상환을 1000억 달러 이내에서 3년간 지급 보증하는 것이다.

금융권의 유동성에 숨통이 트일 만한 대책이었다. 하지만 야권은 ‘정부 대책과 은행의 자구방안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강만수 장관의 해임이 우선이다’는 등 조건을 달며 처리를 미뤘다. 그 기간 자금줄이 막혀버린 중소기업은 공장 문을 닫고, 가계 부실은 더욱 커져갔다. 김 전 실장이 지적한 것은 바로 이 대목으로 보인다. ‘경기 살리기’를 위한 정책에 야권이 정치적인 이유로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은행들의 자구책 마련이 먼저’라는 야권의 주장도 설득력이 없지 않습니다. 외환위기 이후 은행들이 ‘외형 키우기’에만 집착했던 게 사실 아닙니까?
“은행들을 비판하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중소기업, 가계를 위해서라도 은행의 자금줄이 뚫려야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은행들은 지난 외환위기 때도 정부로부터 100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예대마진(예금-대출 사이의 이자 차익) 영업, 담보대출 등 단기실적 내는 데만 급급했습니다. 건전성은 뒷전이었고, 실적 올리기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얘기입니다. 지금 은행장 연봉이 얼마입니까? 수억원대입니다. 대부분 스톡옵션 때문이죠. 실적을 많이 올려야 자신들의 연봉이 많아지는데, 누가 건전성을 추구하겠습니까? 머니 게임이 판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문제는 이뿐 아닙니다. 은행장 등 은행 고위 간부들이 돈을 이처럼 많이 받는데, 노조가 가만히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러니까 전 직원의 월급이 올라간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금융권 관계자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한때 정부는 “우리나라는 삼성, LG 등 세계적인 제조기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금융회사는 없다”며 “투자은행(IB)을 육성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금융산업 육성론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금융은 산업이 아니라 실물경기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 같은 성격이 강한 부문입니다. 금융산업을 육성해서 성장동력으로 삼자는 주장은 환상입니다. 이번 세계 금융위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금융부문의 발전은 제조업과 같은 실물경제의 성장, 경쟁력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금융부문과 실물부문의 괴리(버블)가 커지면 결국 금융경제가 타격받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은행의 책임은 개인의 예금을 받고, 은행 채권을 산 사람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를 운영해 수익을 올리되, 부실채권이 생기면 지체 없이 털어서 질적 건전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상업은행이 기업의 자금 중계 기능을 원활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증권사와 달리) 보수적으로 안전성, 건전성을 중시하는 운용을 해야 합니다.”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조언하신다면?
“앞서 말했지만 새로운 금융체제 시대의 개막을 준비해야 합니다.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한국 경제 앞에 또 다른 변화가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국제적 공조를 잘하지 않으면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정부와 재계는 물론 학계, 언론계 등 사회 각계각층이 한마음 한뜻을 가져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기술과 접목한 부품산업을 육성하는 등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산업을 발전시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