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은 굵고 짧게 하는 것이 비결
한국경제에 제비가 날아온다. 글로벌 경기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하면서 한국경제도 불황터널을 보란 듯이 탈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기업 환부를 도려내는 메스를 무디게 만든다. 재무개선을 약속했던 일부 대기업은 ‘버티기’에 돌입한 지 오래다.
중소형 건설·조선사에 대한 구조조정도 지지부진하다. 정부 정책 역시 기업 구조조정보단 일자리 창출에 맞춰져 있다. ‘미스터 워크아웃’ 이성규(51) 유암코 대표를 만나 구조조정의 필요성과 한국경제의 미래를 들었다.
>> 기업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 채권단 중심의 구조조정이 한계를 드러낸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나서야 하는가?
“1998년 외환위기 때와 분위기가 다르다. 그땐 정부든 누구든 나서면 따라야 한다는 위기 의식의 공감대가 있었다. 지금은 각자 이익을 우선하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하지만 시장실패요인에서는 필요한 정부 역할이 분명히 있다.”
>>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순 없지 않은가. 구조조정 시기를 놓치면 한국경제는 재도약의 기회를 잃을 수 있다.
“당연하다.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증소형 조선사 등에 대한 구조조정은 시급하다.”
이 대표의 말처럼 건설사의 부동산 PF 부실문제는 한국경제의 뇌관이다. 이 대출 규모는 80조원을 훌쩍 넘었다. 악화우려가 있는 대출은 5조원에 육박한다. 연체율도 3%에 이른다. 당장 올해가 위험하다. 한국기업평가는 ‘국내 건설사의 부동산 PF 우발채무 45조6518억원(2009년 9월 현재) 중 53%에 해당하는 24조3262억원의 만기가 1년 이내’라고 밝혔다.
이는 한기평이 신용등급을 보유한 종합건설사 40곳을 분석한 결과로, 건설사의 단기 상환 부담이 크다는 의미다. 중소형 조선사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로 물동량이 줄면서 수주 감소는 물론 수주분 취소까지 겪고 있다. 발주된 선박건조를 늦춰달라는 요청도 속출한다.
중소형 조선사의 부실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판이다. 하지만 이런 부실을 도려내는 작업이 더디다. 지난해 금융권 여신 500억원 이상으로 신용위험평가에서 C등급(워크아웃 대상)을 받은 건설·조선·해운사와 대기업 54곳 중 12곳의 워크아웃이 무산됐다.
“도미노 부도 방어 통해 집단 쇼크 해소해야”
이 중 4곳은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버티기’에 돌입했다. 이성규 대표는 “위기감이 없는 것 같다”고 일침을 놓았다.
>> 구조조정이 부진한 이유는 무엇인가?
“채권자 구조가 복잡해졌다. 가령 SPC(특별목적회사)를 통한 PF로 장부상의 부채가 부외부채로 변했고, 매출채권 등의 자산유동화를 통해서 금융기관 채무가 시장조달 채무로 상당 부분 바뀌었다. 다시 말해 채권단 구성이 어렵다.
중소형 조선사의 경우도 RG(선수금환급보증)나 키코로 채권신고가 쉽지 않다. 주채권 은행의 개념도 약해졌다.”
>> 금융당국은 우리 경제의 체질 강화를 위해 선제적 구조조정을 강조하고 있다. 올해엔 회생 가능성이 낮은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을 중단한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가져온 금융경색을 막는데 치중했다. 유동성 위기를 벗어난 만큼 정책의 초점이 달라져야 한다. 정부는 2009년 12월말까지 시행하기로 했던 중소기업 대출 만기연장 조치와 패스트 트랙(신속지원) 프로그램 등 중기 지원책을 2010년 6월 말까지 연장하기로 했다. 일시에 끊기보다 충격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 보이는데, 지원만 해서는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 일러도 올해 상반기까진 구조조정이 지연될 것이라는 예상인가?
“세계적 현상이다. 선진국들도 출구전략이나 구조조정 방향에 혼선이 있다.”
>> 왜 상반기인가?
“우리의 경우 특수한 사정이 더해진다. 아무래도 6.2 지방선거가 있다. 경제문제란 정부에게 정치경제다. 부실한 부동산 PF의 사업장이나 중소형 조선사의 구조조정은 지방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변수다. 구조조정이란 수술은 초기에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가뜩이나 침체된 지역경제에 충격을 준다. 정부로서도 과감히 다루기에 쉽지 않은 숙제일 것이다.”
>> 정치가 경기 회복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뜻인가?
“꼭 그렇다고 할 순 없지만, 구조조정이란 사실 유권자에게 매력 없는 주제다.”
>> 지방선거 결과가 구조조정 분위기를 바꿔놓을 가능성도 있다.
“여당이 이기면 (구조조정을) 밀어붙이는데 부담이 덜 하지 않겠나? 사실 결과에 관계없이 구조조정은 과감히 단행해야 나가야 할 것 같다.”
부실기업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지속성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가 기회를 잡으려면 구조조정을 통해 산업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이성규 대표는 “정부가 먼저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6·2 지방선거, 구조조정 변수
> 정부가 비전제시를 잘하고 있다고 보나?
“문제는 파악하고 있다고 본다. 그림도 있을 것이다. 다만 구조조정은 속도감이 필요하다. 구조조정이란 생사를 가르는 일이다. 정부든 기업이든 리더십과 자신의 목숨을 거는 자세가 필요하다. 굵고 짧게 끝내야 한다. 수술을 길게 해서는 안된다.”
>> 정부든 기업이든 리더십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금호그룹 사태를 보자. 외환위기 당시 대우그룹의 부실규모는 65조원이었다. 그래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지 않았나. 금호그룹의 부실규모는 4분의 1 수준이다. 계열사간 지분구조나 채무구조도 대우처럼 복잡하지 않다. 그런데 대우건설을 비롯해서 금호의 구조조정은 생각보다 오래 끌어왔다. 대우건설과 관련한 FI(재무적 투자자)의 존재가 채권구조상 복잡한 구조이긴 하지만 대우 사태 때도 이런 비협약 채권자들은 있었다. 계열사의 주채권은행들의 긴밀한 공조체제가 필요하다. 중심에 서있는 산업은행은 이들을 아우르는 리더십을 발휘해줘야 한다.”
이 대표는 “때를 놓치면 기회비용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조조정을 늦출수록 부실을 회복하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주장이다. 더 무서운 것은 ‘불확실성’이라고 했다. 불확실성은 시장을 꽁꽁 얼리게 마련이다. 적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가 실탄(자금)을 쏘겠나. 10대 그룹 현금 유보율이 1000%에 육박하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투자처를 찾지 못해 돈을 쟁여놓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의 후유증도 걱정거리다. 구조조정은 양날의 칼이다. 부실 정리를 통해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일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 실업률이 증가하게 마련이다. 확장적 재정정책으로 글로벌 불황을 탈출하고 있는 우리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정부는 그간 나랏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했다. 향후 이 돈을 회수하는 출구전략이 추진되면 무엇보다 시장 활성화가 중요하다. 나랏돈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민간 소비가 메워야 하기 때문인데, 그러기 위해선 고용이 뒷받침돼야 한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사람이 지갑을 열겠는가.
>> 청년 실업, 베이비붐 세대의 대량 퇴직에 이어 장년층 취업자까지 급감하고 있다. 여기에 강도 높은 구조조정까지 진행되면 실업률이 더 높아질 텐데….
“구조조정의 후유증은 마찰적 실업이다. 피할 수 없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을 어떻게 재고용할지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고민이 필요하다. 일시적 고용쇼크를 막기 위한 대책이 양산돼선 곤란하다. 장기적 계획이 필요하다.”
문제는 또 있다. 부실채권 처리다.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 부실채권이 쏟아져 나온다.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고정 이하 여신비율(NPL비율)과 같은 건전성 지표가 훼손될 수 있다. 한화증권은 2008년 보고서에서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 은행이 감당해야 할 부실채권이 32조원에서 69조8000억원으로 두 배 이상 껑충 뛸 것”이라고 전망했다.
>> ‘올해 은행권의 화두는 부실채권 처리’라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 은행권이 가지고 있는 기업의 잠재 부실채권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은행의 미래 손익과 건전성이 영향 받는다.”
구조조정 후유증 ‘마찰적 실업’
>> 부실채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은행권의 부실채권 비율은 2009년 12월말 현재 1.2% 남짓이다. 평상시에는 1% 미만에 머무는 것이 보통이다. 지금의 이 수치엔 부동산 PF와 중소형 조선사의 잠재부실채권이 덜 반영돼 있다. 구조조정이 본격화하면 부실채권 비율은 빠르게 상승할 수 있다. IMF 외환위기 수준(8%)까진 아니겠지만 많이 높아질 가능성은 없지 않다.
소위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채권은 지금까지도 시장에서 쉽게 처리되지 않고 있다. 은행들이 나눠서 들고 있는 기업부실채권을 한데 모아서 처리하는 틀이 만들어져야 한다.”
이 대표가 지난해 10월 민간 배드뱅크 유암코의 영입제안을 수락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는 “금융기관과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을 만들어 부실채권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 구조조정을 전제로 한국경제를 전망한다면?
“정부는 올해 정책 방향을 ‘옥석 가리기’에 맞춰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질 수 있다. 일본 JAL이 무너진 것도 내부 부실을 감춰놓고 제대로 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풍랑이 거세질 때 너나 할 것 없이 난파선에 매달리면? 몰살이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생존 DNA’를 전파해야 한다. 정부의 몫은 살 자와 죽을 자를 가려내는 것일지 모른다. 혹독하지만 어쩔 수 없다.
전투에서 이기는 장수는 전장에 나가기 전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법이다. 여기에 감정도, 정치논리도 개입돼선 안 된다. 이를 간과하면? 대한민국호(號)는 또다시 ‘불황의 급물살’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부실기업의 환부를 도려내는 칼날이 매섭고 날카로워야 하는 이유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
정 교수가 추천한 회사명은 한국신용평가정보(한신평). 이 대표는 낯선 회사명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정 교수의 말을 따랐다.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다. 이 전 부총리는 당시 한신평의 사장이었다.
이 대표는 “이 전 부총리의 첫 인상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며 “출근하라는 연락이 오랫동안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던 생각만 난다”고 회상했다. 한신평에 취직한 그는 이 전 부총리의 철학을 꼼꼼하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 전 부총리는 외부 기고를 종종했는데, 이를 정리하는 일을 이 대표가 맡았던 것이다.
그와 이 전 부총리의 끈끈한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1998년 금융감독위원장에 취임한 이 전 부총리는 이 대표를 ‘자문역’에 발탁했고, 곧 이어 금감원 기업구조조정위원회 사무국장에 임명했다. 39세에 불과했던 이 대표가 100조원에 이르는 부실채권을 처리하게 된 것이다.
불혹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대우그룹 등 대기업의 워크아웃을 추진한 이 대표도 대단하지만 그런 막중한 자리에 ‘젊은 피’를 과감하게 수혈한 이 전 부총리의 결단 역시 놀랍다. 이 대표는 “이 전 부총리가 대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직접 전화한 것은 두 번뿐”이라며 “그만큼 실무자의 견해와 활동을 신뢰하고 존중했다”고 말했다.
‘정부의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거론되는 이름이 있다. 이헌재다. 그럼 이 전 부총리의 구조조정 철학과 전략은 무엇일까. 이 대표는 즉답을 피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공직자가 재판과 감사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소신껏 일해야 한다. 공직자에겐 항상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이 전 부총리는 뒷일을 걱정하기보다는 방향이 맞는다고 생각되면 치밀하게 준비해서 밀고 나갔다. 구조조정의 일에는 배포와 지혜, 그리고 소명의식이 필요조건 같다.” 이 전 부총리의 구조조정 DNA는 긍지와 책임감이라는 얘기다.
유암코는?
2009년 10월 농협·신한·우리·하나·기업·국민 6개 은행이 출자금 1조원과 대출금 5000억원 등 1조5000억원을 투입해 설립한 국내 최초 민간 배드뱅크다. 이 회사는 총 5조원 규모의 부실채권을 처리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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