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기의 종착은 미지수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상징하는 묘비. |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확산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적어도 2005년 말부터 위기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심심치 않게 있었음을 안다. 세계 유명 투자은행이나 일부 유럽계 금융기관의 소수 전문가가 그 가능성을 꽤 심각하게 거론했다. 그때야 아무도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고 치자. 왜냐하면 1929~1934년 대공황을 경험한 이래 공황과 같은 경제위기는 쉽게 오지도 못하거니와 전 세계적인 공황은 불가능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위기라 하면 지역적·부분적 위기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예를 들면 멕시코, 칠레와 같은 중남미 경제는 1980년대 금융위기를 경험하면서 혹독한 경기침체를 경험한다. 경험의 대가가 얼마나 컸으면 해방신학과 경제학이 융합된 비주류 경제학 종속이론이 나오게 되었을까? 얼마 가지 않아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를 통해 아시아 경제가 혹독한 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전쟁 통해 해결된 대공항
공황이나 장기간의 불황 같은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실업처럼 부정적인 파급사태가 발생한다. 동시에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를 야기할 만한 사회·정치적 빌미를 제공한다. 경제적 파장은 크고 수많은 쟁점이 부닥쳐 정책을 펴는 게 더 어려워진다.
대부분의 경제정책은 하나의 예측 가능한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다. 무수히 많은 변수를 바탕으로 다양한 결과를 초래한다. 가령 경기가 침체하면 경기부양책이 필요함에도 이를 주저하는 것은 바로 인플레이션을 우려하기 때문이고, 이는 과거 경제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트라우마 탓이다.
예를 들어보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패전국인 독일은 배상금 지급을 위해 엄청난 통화 공급을 집행했다. 이것이 바로 독일의 초고인플레이션을 촉발시킨 단초가 됐다. 연이어 독일 경제의 초고인플레이션은 히틀러와 나치당을 출범시키게 되고 역사의 바퀴는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또 다른 패전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어쨌든 짧게는 4년, 길게는 10년간의 대공황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통해 해결된다. 케인스 역시 자신이 주장하는 정부의 막대한 경기부양이란 곧 군비확장이라는 점을 명시하기도 했다. 군비확장만이 인플레이션 우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의회와 국민을 설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은 발발했다. 미국은 이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인플레이션을 간접 경험한 국민과 정치인들의 우려를 뒤로하고 군비확충을 통한 공황탈출을 시도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독일은 다시 패전국으로 배상금 문제 해결에 나서야 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더 이상 초고인플레이션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만큼 세계경제는 과거 경험을 통해 ‘노련’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화폐로 배상 받지 않고 금으로 대체한 점이다. 당시는 금본위제도하에서 영국 파운드화에 고정된 환율제도가 세계 금융시장의 기준 환율제도였다. 이후 금에 고정된 미 달러화의 교환비율로 세계경제의 결제가 이루어지면서 경제 패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동한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리더십에 바탕을 둔 세계경제는 IMF(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유엔, 그리고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를 출범시킨다. 이로써 미국은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마침내 세계경제와 정치, 그리고 군사력의 수퍼 강국으로서 자리매김한다.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는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 오일쇼크를 경험한다.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의 위기가 주목 받는 이유는 이 두 차례의 위기가 세계무역과 금융시장의 통화체제에 일대 변화를 야기했기 때문이다.
노련한 미국, 순진한 유럽?
1971년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한 지 4년여의 시간이 지나고 출범한 G7 체제는 금본위제도를 폐지하고 직접 미 달러화에 대해 각국 통화의 환율을 정의하는 변동환율제도와 달러화 기축통화제도의 출범을 의미한다. 미국 달러화가 더 이상 금이라고 하는 자산의 담보 설정 없이 바야흐로 글로벌 경제의 기축통화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된 것이다.
1980년대 초반 2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미국은 독일, 일본과 함께 조금도 주저 없이 ‘플라자 합의’를 통해 달러 파워를 다시 한번 국제사회에서 확인한다. 달러가 기축통화로 지위를 공고히 하는 동안 미국 경제는 제조업과 금융산업 중 후자에 비중을 높이는 산업구조의 변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제조업은 다국적기업이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고, 금융산업은 파생상품 시장과 헤지펀드를 통해 새로운 기법과 상품을 만들었다. 어쨌든 제조업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미국 경제는 지속적으로 잔 펀치를 맞으며 크고 작은 경기변동을 경험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며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클린턴 정부는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저금리정책과 함께 ‘소유사회(Ownership society)’를 모토로 내건다. 그런데 재정적자도 흑자로 전환시켰건만 레이거노믹스에 필적할 만한 ‘클린턴노믹스’ 얘기는 없다. 왜 그럴까? 8년의 임기 후 다시 부시 주니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클린턴 민주당 정부의 ‘소유사회’를 계승한다. IT(정보기술) 버블, 원자재 가격의 급등, 경기호황, 저금리, 그리고 9·11까지 여러 가지 비밀스럽지 않은 내용물이 뒤엉키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이라는 부동산 버블이 터졌다. 2006년 12월 미 의회 청문회에서 그토록 염려했지만 버블 붕괴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곧 이어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고 월가의 주요 투자은행이 여러 은행에 인수합병되고 금융위기가 급속히 실물경제로 번지게 된다. 글로벌 대경기불황의 시작은 그렇게 다가왔다. 2008년 9월 15일이 정점이었다.
노련한 미국이 위기를 자초했으니 순진한 수많은 나라의 경제는 그야말로 아우성이 났다. 유럽 금융기관이 그랬다. 남유럽 재정악화 사태는 그저 얼간망둥이 같은 사태다. 독일이 나서서 입막음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하드파워에 의한 통일에는 실패했지만 이번 일로 해서 8부 능선까지 도달했던 유로화에 의한 단일 화폐 사용과 독일의 유럽 경제 통일 꿈이 신뢰성에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 같다.
글로벌 리더라는 ‘하얀 모자’를 써 보지 못한 독일로서는 또다시 ‘검은 모자’를 쓴 악동의 이미지를 갖게 되지 않을까 염려스럽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여기서 언급되지 않은 ‘순진한 자’들의 향배다. 과연 이번 위기의 최종 종착점이 유럽으로 결정된 것인지, 아니면 계속해서 중국 등 아시아로 번질 것인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세계경제가 보여주는 예시는 여기서 끝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도 분명히 미완성이다. 확신할 수 있는 증거들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곽수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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